서운해서 올리는 리뷰 - 서올리
“영화는 꿈이란다. 절대 잊히지 않는 꿈.” 극장 앞에 선 엄마의 말 한마디와 그날 ‘지상 최대의 쇼’를 본 경험은 소년의 평생 꿈이자 과업이 됐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자신의 유년 시절을 고스란히 녹여낸 ‘파벨만스’(22일 개봉)는 영화에 대한 거장의 연서이자 예술가의 고백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어떤 면에선 치부를 드러낸 가족 드라마는 낙관과 희망이란 스필버그의 마법으로 꿈을 응원하는 희망의 동화가 된다.
아버지(폴 다노), 어머니(미셸 윌리엄스)와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 속 열차 탈선 장면에 어린 샘(마테오 조리안)은 눈이 휘둥그레진다. 스크린 속 스펙터클은 소년의 마음을 헤집어 놓고, 카메라로 그것을 재현하려는 욕망을 실현한다. 소년 샘은 어린 스필버그의 모습과 다름없다. 영화를 찍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즐거움을 알게 된 소년은 영화의 세계로 들어섰다.
영화는 소년 스필버그 인생의 단면을 쇼트로 미분해서 영화적 순간으로 적분한다. 유년 시절 추억을 포착한 쇼트 하나하나도 훌륭하지만, 그것들이 모여 자신의 영화 세계가 형성됐음을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주지시키는 거장의 솜씨는 경이적이다.
노장은 가슴 아픈 가정사마저 지극히 영화적으로 드러낸다. 10대가 된 샘(가브리엘 라벨)은 가족과 캠핑을 갔던 영상을 편집하면서 캠핑에 동행한 아저씨 베니(세스 로건)와 사랑에 빠진 어머니의 눈빛을 포착한다. 카메라의 눈이 때로는 인간의 눈으로는 보지 못한 진실을 드러낸다는 사실. 샘은 해당 부분을 잘라내고, 어머니의 매혹적인 순간만 담아 가족들에게 보여준다. 카메라가 꿰뚫은 씁쓸한 실재를 보여주는 것 대신, 기꺼이 아름다운 환상을 보여주겠다는 스필버그의 미학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땡땡이 데이' 기념 영화 만들기에서 이 같은 상황은 한 번 더 반복된다. 샘은 자신을 괴롭힌 로건을 레니 리펜슈탈의 나치 독일 영웅처럼, 무슨 남신처럼 그려낸다. 로건은 샘에게 따진다. "왜 날 그렇게 찍었지? 그건 내가 아니야. 난 그렇게 될 수 없어."(대사가 정확하진 않다. 이런 취지였다..) 샘의 대답. "영화를 좋게 하다 보니까." 내 맘대로가 아닌 현실과 달리 스필버그가 만들어낸 스크린 속 세계는 매끄럽다. 통제 불가능한 현실을 통제 가능한 꿈의 세계로 만드는 게 스필버그 영화의 최우선 원리 아닐까.
이성적이고 성실하지만, 영화를 ‘취미’로 치부했던 꽉 막힌 아버지와 샘이 영화 찍는 것을 누구보다 응원한 감성적인 어머니에 대해 감독은 미묘한 감정을 드러낸다. 표면적으론 가정을 떠난 어머니를 원망하지만, 한편으론 가정에 묶여 이루지 못한 어머니의 예술적 열망을 동정하고, 어머니와 달리 자신은 예술을 끝까지 추구해야 함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그런 점에서 영화 중반 등장하는 보리스 외삼촌의 충고는 스필버그의 변명이자 각오다. “예술을 하면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어. 가족과도 멀어질 거야. 하지만 넌 해야겠지. 안 할 수 없을 거야.”
우여곡절 끝에 영화판에 입성한 샘은 전설적인 영화감독 존 포드(데이비드 린치)를 만난다. 시가를 뻑뻑 피우던 포드의 한마디. “영화에서 지평선을 바닥에 두거나 꼭대기에 두면 흥미로워. 그걸 중앙에 두면 더럽게 지루해.” 사무실을 나서고 할리우드 거리를 걷는 샘. 수평적으로 샘의 뒷모습을 담던 카메라는 지평선을 바닥에 두며 황급히 뛰어오른다. 거장의 인상적인 조언과 이것을 실천하는 스필버그의 위트가 빛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