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워서 올리는 리뷰 - 서올리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아일랜드의 외딴 섬 이니셰린에 사는 콜름(브랜던 글리슨)은 어느 순간 절망에 빠진다. 그리고 절친인 파우릭(콜린 패럴)과 절교를 선언한다. “그냥 이제 자네가 싫어졌어.” ‘다정하고 좋은 친구’ 파우릭이 관계 회복을 시도할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고, 마을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연출 마틴 맥도나·사진)는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 두 남자가 끝내 한 사람이 죽어야 하는 극한 갈등으로 치닫는 과정을 다룬 우화다. 감독의 전작 ‘쓰리 빌보드’처럼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이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고, 사소한 죄악은 파국을 야기한다. 관계의 단절에 대한 역사적이고 초월적이며 사려깊은 성찰이 돋보인다.
파우릭과 콜름의 불화는 필연적이다. 둘의 성향이 다르기 때문. 콜름은 절교로 인해 파우릭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지만, 관계의 단절은 가진 것이라곤 다정함뿐인 파우릭에겐 상처가 된다. 반대로 파우릭의 끈질긴 관심은 평온함을 추구하는 사상가 콜름에게 중대한 위협이 된다.
콜름은 파우릭이 말걸 때마다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자해’를 한다. 그 행동은 예기치 않게 파우릭이 가장 아끼는 당나귀 제니를 죽음으로 이끄는 ‘가해’가 된다.
영화의 배경이 1923년 내전 중이었던 아일랜드란 점에서 파우릭과 콜름의 대립은 아일랜드의 내전 상황과 오버랩된다. 부모가 아일랜드 출신인 맥도나 감독은 “저쪽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때 두 남자 사이에 일어나는 작은 전쟁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콜린 패럴, 브랜던 글리슨, 케리 콘돈, 베리 키오건 등 주조역 4명 모두 아일랜드 출신에 남자 셋은 더블린 동향이다.
죄와 구원의 관점으로 봐도 흥미롭다. 절교의 원인이었던 콜름의 절망은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죽을 것이란 불안에서 초래된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희망이 없는 것은 죄악”이라 했다. 반대로 다정한 남자 파우릭은 콜름과의 절친 시절이 그리워서 콜름의 새로운 친구를 질투하고, 거짓말한다. 극한 갈등이 이어지며 그의 천진함은 점차 사라져 가고, 끝내 콜름을 직접 공격하며 ‘전쟁’을 선포한다.
콜름의 절망과 파우릭의 전쟁 선포는 모두 죽음과 연결돼 있다. 앞서 말했듯 키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칭했고, 전쟁(내전)은 어느 한쪽의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영화의 마지막 파우릭은 “우리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제목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밴시는 스코틀랜드 민화 속 죽음을 예고하는 귀신이다. 영화에선 한 노파가 셰익스피어극의 마녀처럼 죽음에 대해 예언을 한다.
파우릭과 콜름은 서로를 증오하지 않는다. 파우릭은 콜름이 아끼는 강아지를 보살피고, 콜름은 경관에게 맞은 파우릭을 안아준다. 서로 아끼는 두 사람이 끝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는 아이러니.
영화는 의도치 않게 죄를 저지르고, 타인에게 상처 주는 인간이란 존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란 화두를 던진다. 파우릭과 콜름, 두 사람의 꼬인 실타래는 결코 당사자가 풀 수 없다. 성모상과 십자가가 이니셰린 주민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장면의 반복이 힌트가 될 수 있다. 둘의 극한 대결 이후 다음 날 아침, 파란 하늘에 떠오른 밝은 빛이 집과 마을, 그리고 그들을 비춘다.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작품상을 포함한 9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다. 그런데 결과는.. 뛰어난 극작가인 맥도나는 대사 한 소절에도 희비극을 담아냈다. 원형의 캐릭터와 갈등, 이야기 구조로 복잡 미묘한 뉘앙스를 만들어낸 걸작이다.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며 형태의 원형을 그려낸 폴 세잔의 그림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