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워서 올리는 리뷰 - 서올리
태초에 여자아이가 있었고 (당연히) 인형이 있었다. 특히 바비 인형은 여자아이들의 꿈이다. 의사 바비, 기자 바비, 우주비행사 바비, 그냥 예쁜 전형적인 바비 등 바비가 그 모든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여자아이들도 모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켄은 바비의 짝일 때만 의미가 있다.
19일 개봉한 영화 ‘바비’(연출 그레타 거윅)는 핑크빛의 알록달록 세계를 꾸몄지만, 그 속에 품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사회학 서적을 꿀꺽 먹어치운 듯 젠더와 사회 구조에 대해 털어놓는다. 주연을 맡은 마고 로비와 거윅 감독이 인정했듯 페미니스트 영화이면서, 그에 앞서 실존을 깨닫고 이상향을 추구하는 이야기이다. 무거운 주제를 경쾌하게 풀어냈다.
수많은 바비와 켄이 살고 있는 ‘바비랜드’에서 완벽한 삶을 살던 전형적 바비(마고 로비)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고부터 이상이 생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실의 로스앤젤레스(LA)로 간 바비와 그녀의 짝 켄(라이언 고슬링)은 각자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된다.
바비랜드에서 현실로 가며 남녀 위상은 완전히 뒤바뀐다. 바비랜드에선 바비가 갑이고, 켄은 을. 바비는 대통령도 하고, 노벨문학상도 받지만, 켄은 바비 없이 혼자선 ‘무쓸모’한 존재다. 반대로 현실에선 남성이 우위에 선다. 화려한 복장을 한 바비가 현실 세계에서 처음 맞닥뜨린 건 남성들의 시선이다. 그런데 켄은 길에서 한 여성이 자신에게 시간을 물어보자 환호한다. "나도 여기선 인정받는 존재구나!" 바비를 만든 완구 회사 마텔의 임원들도 모두 남성이다.
영화는 바비와 켄의 현실 소동을 간략히 마무리하고, 곧바로 다음 챕터로 나아간다. 켄은 가부장제를 바비랜드에 전파하고, 바비와 켄의 관계는 급속히 역전된다. 대통령 바비는 켄의 맥주를 서빙하고, 의사 바비는 켄이 운동할 때 옆에서 응원한다.
‘바비’가 페미니스트 영화임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여성만을 위한 영화는 결코 아니다. 현실의 글로리아(아메리카 페레라)가 여성의 고충에 대해 일장연설을 펼치는 대목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엄마의 아들이자 엄마의 여자 형제인 이모의 조카야"라는 마텔 CEO(윌 페럴)의 대사처럼 모든 남성은 모든 여성의 아들이거나 남편, 혹은 아버지란 점에서 남녀 모두에게 통하는 메시지이다.
그렇다고 남성 캐릭터 켄이 주변인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니다. 켄이 가부장제를 바비랜드에 들이면서 생기는 후반부 소동은 영화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영화 속 유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라이언 고슬링은 단순한 켄 캐릭터를 순애보와 인정 욕망으로 몸부림치는 남성으로 승격시킨다. 다만 남성은 단순하고, 미련하게 서열을 중시한다거나 ‘맨스플레인’(man+explain) 개념을 활용하는 부분에 대해선 호불호가 있을 수 있다.
오프닝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부터 ‘오즈의 마법사’ ‘쉘부르의 우산’ ‘플레이타임’ 등 다양한 고전 영화들을 변주했다. 거윅 감독은 연인인 노아 바움백과 코로나 시기에 이 작품을 함께 썼다. 부부의 공동 작업 방식은 영화의 메시지를 현실에서 구현한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