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워서 올리는 리뷰 - 서올리
■ 엄태화 감독과 함께 뽑은 결정적 순간 3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아파트에 살고 있거나, 살았거나, 살고 싶어 한다. 아파트는 우리 시대 가장 보편적이면서 한국적인 공간일지 모른다. 9일 개봉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 점을 영리하게 파고든다. 대지진으로 서울이 폐허가 되고 황궁 아파트 103동만 남는다. 디스토피아적이지만, 아파트 소유가 곧 생존이자 권력으로 작용하는 영화 속 황궁 아파트 시스템은 ‘아파트 공화국’에 살고 있는 현재진행형인 우리의 모습이다.
서늘한 블랙코미디이자 생태 고발서로 읽히는 영화는 관객의 가슴에 뜨거운 고민을 던진다. 지난 7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엄태화(사진) 감독과 함께 영화의 결정적 순간 세 장면을 선정했다. 영화의 세계관과 분위기를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순간들이다.
# 장면1 다큐멘터리 방식의 오프닝
영화는 강남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해 브랜드화된 지금까지의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로 시작한다. 아파트에 살게 된 사람들의 당시 인터뷰 장면도 담겼다. 아파트가 단순히 주거 공간을 넘어 가치 자산의 위치에 오르는 과정을 압축해서 보여준 장면이다. 도시가 무너지고 아파트들이 붕괴되는 재난 장면은 영화 중반에야 등장한다. 영화의 관심이 재난이 아니라 아파트와 아파트에 사는 인간에게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자신도 아파트에서 나고 자랐다는 엄 감독은 “한국인에게 아파트는 희비가 교차하는 공간”이라며 “디스토피아지만 현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영화의 세계관을 압축적으로 소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장면2 영탁이 주민대표로 뽑히는 반상회
유일하게 남게 된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다른 아파트에서 몰려든 외부인들의 거취를 결정하기 위해 반상회를 연다. 이 자리에서 영탁(이병헌)이 주민대표로 선출되고, 주민들은 비밀투표를 통해 외부인들을 몰아내기로 결정한다. “자가(집 소유자)가 아니면 회의에서 빠지라” “(비싼) 옆 아파트가 우리를 얼마나 무시했냐” 등 주민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웃기면서 신랄하고, 섬뜩하다. 극한 상황을 맞은 인간들의 이기주의적 행태를 꼬집으며 아파트가 사회의 축소판임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 있었기에 “이 아파트와 우리 주민들이 선택받았다고 생각한다”는 영탁의 대사도 존재할 수 있었다. 엄 감독은 “블랙코미디로서의 영화 톤을 잡는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반상회를 보듯 실감난다. 엄 감독은 “아파트가 워낙 관객에게 익숙한 공간이라 조금이라도 가공된 느낌을 관객이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40여 명의 배우들이 한데 모인 장면임에도 단번에 촬영을 마친 것은 엄 감독과 베테랑 배우들의 공이다. 엄 감독은 “본 촬영 전에 배우 한 명 한 명에게 전화를 돌려 캐릭터와 관련돼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며 “첫 촬영 때 이미 모두가 아파트 주민들처럼 회의를 하고 있었고, 살아있는 에너지가 전달돼 장면이 잘 나올 것이라고 직감했다”고 전했다. 3층 높이의 아파트 세트엔 앞마당과 뒷마당까지 만들고, 실제 아파트 복도 크기와 똑같이 맞춘 것도 현실성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장면3 아파트 내 잔치
영화의 최대 변곡점이다. 바깥에선 사람들이 얼어 죽고, 굶어 죽는데 아파트 주민들은 웃고 떠들며 잔치를 벌인다는 설정은 그로테스크하다. 엄 감독은 “한국 사람이라면 이런 재난 상황에서도 춤추고 노래하는 걸 멈추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며 웃었다. 영탁이 단상 위에 올라 윤수일의 ‘아파트’를 부르는 장면 이후 영화는 서늘하고 관조적인 블랙코미디에서 뜨겁고 격렬한 드라마로 급변한다.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영탁과 주민들이 아파트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괴물이 돼가는 모습은 ‘악의 평범성’을 잘 보여준다.
영화는 뜨거운 감정과 차가운 관찰이 묘하게 공존한다. 엄 감독이 영화를 찍기 전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피카소의 ‘게르니카’ 그림을 보여준 것도 서늘함과 뜨거움이 공존하는 영화의 분위기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엄 감독은 “풍자에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길 원했다”며 “풍자극 안에서 주민들을 연민을 갖고 지켜보며 관객 또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란 질문을 던지길 원했다”고 말했다.
이병헌은 평범한 소시민에서 권력을 갖고 변모하는 영탁 역을 맡아 압도적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박서준(민성)과 박보영(명화) 등이 고루 호연한 가운데, 김선영(부녀회장)의 연기가 돋보인다. 장편 영화 연출은 이제 세 번째에 불과한 엄 감독이 베테랑 배우들로부터 최상의 연기를 끌어낸 비법은 뭘까. 그는 “디렉션의 첫 번째는 좋은 배우를 섭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못하는 사람을 잘하게 만들 능력은 없어서 배우든 스태프든 잘하는 사람을 데려오려고 노력해요. 제가 현장에서 너무 말을 아끼나 싶을 텐데, 전 계속 지켜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