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워서 올리는 리뷰
‘햄버거 장사도 못 할’ 위인에서 쟁쟁한 물리학자들을 이끄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리더’로. 천재 물리학자에서 과학 세일즈맨이란 평가까지. 15일 개봉하는 영화 ‘오펜하이머’는 세계를 구하려다 세계의 파괴자가 된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모순적 면모를 큐브 맞춰나가듯 복합적으로 그려낸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양자역학, 핵분열 등 어려운 물리학 개념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하고, 오펜하이머란 논쟁적 인물을 시간을 교차한 플롯을 통해 입체적으로 되살린다. 쉴 새 없이 휘몰아치며 오펜하이머란 인물을 쌓아가는 건축이나 교향시에 가깝다.
영화는 세 단계로 구성됐다. 놀란 감독은 “이야기가 곧 구조”라는 자신의 방식을 철저히 관철했다. 원작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처럼 영화는 촉망받는 이론 물리학자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를 프로메테우스에 대응시킨다. 초반 1시간은 프로메테우스가 신에게서 불을 훔쳤듯, 오펜하이머가 우주의 원리를 통해 핵분열 아이디어를 얻는 과정을 보여준다.
당대 지식의 최전선에 있던 별들과의 지적 담론의 향연이 핵분열 연쇄반응처럼 숨 가쁘게 펼쳐진다. 오펜하이머와 물리학자, 그를 프로젝트 리더로 임명한 그로브스 중장(맷 데이먼), 숙적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연쇄 반응처럼 그다음을 위한 필연적 원인이 된다.
중반 1시간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줬듯 2차 세계대전 당시 핵무기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맡은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기까지를 그려낸다. 자신이 지지하는 이론을 실제 현실에서 적용해보려는 과학자로서의 욕망과 나치에게 핵 개발을 빼앗길 수 없다는 유대인으로서 사명감이 그를 이끈다.
하지만 핵무기 개발에 가까워질수록, 세계를 종말로 이끌고 있다는 죄의식이 고개를 든다. 그가 동료 물리학자와 함께 이룬 최고 성과가 인류를 위협하는 대량살상무기로 기능할 것이라는 모순이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원자폭탄 개발이 영광의 순간이 아닌 파국의 시작임을 분명히 한다. 오펜하이머는 핵실험이 끝난 뒤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인용해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라고 읊조린다. “인류에게 스스로 파멸할 힘을 주는 것”이라는 보어의 경고도 궤를 같이한다.
원자폭탄 폭발을 성공시키고 단상 위에 오른 오펜하이머에게 청중들은 발을 구르며 환호하지만, 발 구르는 소리는 그에게 원자폭탄 폭발음처럼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그런 점에서 오펜하이머가 마녀사냥을 당하는 후반 1시간은 필수적이다. 인류에게 불을 안긴 프로메테우스가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듯, 인류에게 핵을 가져다준 오펜하이머는 몰락한다. 수치스러운 보안인가 갱신 청문회에서 아무 말 않는 오펜하이머에게 아내 키티(에밀리 블런트)는 “왜 순교자처럼 구느냐”고 타박한다.
이 같은 이야기 구조에 시간대를 교란하는 플롯의 장인 놀란의 솜씨가 십분 활용된다. 세 가지 다른 시간대가 컬러와 흑백으로 교차하며 진행된다.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기까지의 연대기와 2차 대전이 끝난 후 ‘매카시즘’ 광풍에 공산주의자로 몰려 고초를 겪는 청문회는 컬러, 오펜하이머의 스트로스의 상무장관 인사청문회는 흑백으로 진행된다. 컬러 부분은 오펜하이머의 관점으로 그의 방식인 ‘핵분열’이란 부제가, 흑백 부분은 스트로스의 관점으로 그가 반대한 ‘핵융합’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오펜하이머가 핵융합을 통한 수소폭탄을 파괴력이 너무 커 예상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핵분열을 통한 원자폭탄 방식을 추진했음을 반영한 것이다.
컴퓨터그래픽(CG) 없이 재래식 폭약을 폭발시켜 구현한 핵폭발 장면은 장엄하지만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 오히려 스펙터클한 건 클로즈업한 인물들의 얼굴이다. 특히 오펜하이머를 연기한 킬리언 머피는 환희와 절망, 야망과 공허함 등 여러 감정이 섞인 표정만으로 오펜하이머란 인물을 되살려낸다.
오펜하이머를 둘러싼 인물들의 증언이 이어지며 오펜하이머는 어떤 사람인가를 다룬다는 점에서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의 이야기를 다룬 ‘소셜 네트워크’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각 인물의 진술이 다르고 때론 모순되지만, 모두 맞을 수 있다는 점은 양자역학과 상통하는 지점이다.
그간 복잡하지 않아도 될 영화도 복잡하게 만들어왔던 놀란 감독은 복잡한 인물과 그를 둘러싼 역사를 최대한 간결하게 만들었다. 영화를 본 후 인간 오펜하이머와 그의 이론적 바탕인 핵분열-핵융합, 그 결과물인 핵무기, 그리고 그에 따른 인류의 파국이 손에 잡힐 듯한 느낌을 주는 건 이 때문이다. 경이로운 폭발력을 가진 작품으로 이미 21세기 거장으로 칭송받는 놀란 감독으로서도 전환점이 될 만한 그의 최고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