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잠자다 말고 자신의 얼굴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긁고, 갑자기 냉장고에 있는 생고기와 날생선을 허겁지겁 먹는다. 급기야 끔찍한 일까지 저지르고, 아내는 갓 태어난 아기를 지키기 위해 미친 짓도 불사한다. 긴장감 넘치고 무서운데, 기존 호러 스릴러 영화와는 좀 다르다. 공포 영화란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신혼부부의 애틋한 위기 극복기처럼 느껴진다.
영화 ‘잠’(9월 6일 개봉)은 기이하고 불편하지만 외면하기 힘든 사랑스러운 지점이 있는 영화다. 수진(정유미)과 현수(이선균)는 함께일 때 행복한 신혼부부. 이들의 평화로운 일상이 현수의 몽유병 증상으로 깨어지며 영화의 분위기는 급변한다. 낮엔 더없이 다정한 현수는 잠이 들면 언제 갑자기 가족을 해할지 모르고, 엄마가 된 수진은 점점 히스테릭해진다. 누가 더 미친 건지 모를 상황에서 현수의 증상에 대한 또 다른 원인이 제시되고, 영화는 한 번 더 관객의 예상을 벗어난다.
이 영화가 장편 데뷔작인 유재선 감독은 지난달 23일 인터뷰에서 “몽유병을 소재로 재미있는 장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게 일차적 목표였다”고 말했다. 귀신이나 잔인한 연쇄 살인마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과도한 효과음을 넣지도 않았지만, 내내 쫄깃한 긴장을 늦추기 힘들다. 낮엔 가장 나를 아끼는 사람이 밤엔 나를 해할 수 있다는 공포감, 가장 편안한 장소여야 할 집이 언제든 끔찍한 사건의 장으로 바뀔 수 있다는 불안감이 짓누른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애틋한 사랑 이야기 같단 생각이 든다. ‘둘이 함께라면 극복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가훈처럼 수진은 극한의 상황에도 남편 곁에 남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이는 시나리오를 쓸 당시 오래 사귄 여자친구와 결혼을 준비하던 유 감독의 개인사가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유 감독은 “결혼을 앞둔 시점에서 부부 관계에 대해 비관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며 “부부란 단위로 외부적 장애물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감독의 바람대로 수진과 현수는 칼을 들이대는 순간을 겪은 후에도 함께 이고자 한다. 이들의 끈끈함은 부부 관계의 헐거움을 보여주는 주변 인물들과 대조를 이룬다. 무명 배우인 현수를 못마땅해하던 수진의 엄마는 몽유병은 이혼 사유라며 이혼을 종용하고, 아래층 아주머니는 “힘들면 깨버리면 된다”고 말한다.
극한적 상황에 던져진 두 인물이 최선을 다하며 몸부림치는 모습은 예상외의 웃음을 준다. 수진이 현수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직장인의 비장의 무기인 PPT 발표를 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정유미는 귀신도 학을 떼는 ‘맑은 눈의 광인’ 연기를 보여주고, 이선균은 디테일한 연기로 영화의 현실감을 끌어올린다. 유 감독은 “이선균과 정유미 모두 원픽이었다”며 “시나리오를 상상 이상으로 실현해줘서 감격했다”고 말했다.
유 감독은 봉준호 감독의 ‘옥자’ 연출부 출신.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은 봉 감독은 직접 이선균, 정유미에게 작품을 추천했다. “관객으로서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봉 감독님 영화들”이라고 운을 뗀 유 감독은 “영화를 만들면서 ‘내가 굉장히 감독님을 모사하려고 하는구나’라고 느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시나리오를 쓴 뒤 제작사를 찾아가 투자를 받는 통상의 수순과 달리 시나리오를 쓴 후 곧장 콘티부터 만들고, 또 그 콘티대로 찍으려고 노력한 게 대표적이다. 봉 감독은 콘티를 기반으로 한 효율적인 작업 방식으로 유명하다. 이에 대해 이선균은 “완성본을 보니 ‘이 양반이 다 계획이 있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촬영 분량의 90% 이상이 본편에 담겼다”고 말했다. “‘내가 봉 감독님 같은 천재는 아니구나’라고 뼈저리게 느꼈다”는 유 감독의 말이 엄살처럼 들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