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워서 올리는 리뷰 - 서올리
‘극장의 위기’라고 한다. ‘영화 본다’고 하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컴퓨터 모니터로 보는 것이 먼저 떠오르는 시대에 극장의 위기는 영화의 위기로 치환될 수 있을까. 2월 1일 개봉하는 영화 ‘바빌론’(연출 데이미언 셔젤)과 ‘이마 베프’(연출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영화에 대한 영화로 스크린을 통한 영화적 체험을 예찬한다. 2022년 미국 할리우드와 1996년 프랑스로 태생이 다르고, 영화의 규모와 분위기도 확연히 다르지만, 두 영화 모두 어둑한 극장 속 스크린에 비쳐야 비로소 빛나는 영화의 마술적 아름다움을 믿고 사랑한다.
<바빌론>
‘바빌론’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1920∼30년대 할리우드 격변기를 배경으로 무성영화의 스타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 스타를 꿈꾸는 여배우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 영화계에 막 뛰어든 이민자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의 성공과 쇠락을 다룬다. 이들은 저마다 영화에 대한 애정을 품고 꿈을 꾸지만, 거대한 꿈의 세계에 삼켜져 버린다.
마약·술에 취한 광란의 할리우드
장엄한 대서사시일 것이란 예상은 코끼리가 분뇨 세례를 퍼붓는 초반부터 무너진다. 매니는 황무지에서 할리우드 제작자 파티장까지 코끼리를 옮겨야 한다. 코끼리의 무게 때문에 언덕길을 오르지 못하고 주저앉으려는 찰나, 코끼리가 분뇨를 한 바가지 싼다. 몸이 가벼워진 코끼리를 실은 트럭은 다시 전진한다. 이 장면은 할리우드 영화판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재밌는 볼거리(코끼리)를 위해선 더러운 오물은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진실. 이어지는 광란의 파티. 옷을 홀딱 벗은 채 마약과 술에 떡이 되는 곳. ‘신(新)바빌론’ 할리우드다.
거칠고 질척한 19금 버전 ‘라라랜드’
자극적이고 지저분한 이미지가 휘몰아치는 ‘바빌론’의 매운맛은 두 청춘 남녀의 꿈과 사랑을 산뜻하고 아련하게 보여준 감독의 전작 ‘라라랜드’ 같은 분위기를 기대한 관객을 당황시킨다. 그런데 영화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전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넬리는 미아(엠마 스톤)처럼 할리우드 배우의 꿈을 향해 돌진하고, 매니는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처럼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며 자신의 꿈을 향해 전진한다. 저스틴 허위츠의 재즈 리듬도 반갑다. 거칠고 질척한 19금 버전 ‘라라랜드’랄까.
영화란 수많은 스태프의 노고가 빚어낸 마술이자 관객이 봐야만 완성되는 예술
그렇지만 ‘바빌론’은 무리한다 싶을 정도로 영화에 대한 애정을 퍼붓는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영화가 그리는 무성 영화 시절 할리우드는 난장판이지만 그만큼 낭만적이다. 잭은 숙취에 허우적대는 주정뱅이지만, 수많은 스태프들의 노고 끝에 담기는 노을 속 그의 옆얼굴은 영화가 가진 순간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다. ‘바빌론’은 카메라 릴이 돌아가는 모습과 스크린을 보며 기대에 찬 관객들의 모습을 주기적으로 비추며 영화와 영화적 경험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애정이 과했을까. 감독이 이것저것 하고 싶은 얘기를 쏟아내면서 서사가 산만해지고, 188분이란 러닝타임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게 된다. 매니와 넬리의 사랑이란 주 서사보다 그 시절 할리우드의 실체를 까발리는 주변 소동이 더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대목은 넬리가 유성 영화를 처음 촬영하는 20분간의 히스테리적 시퀀스. 사운드의 도입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를 이 20분만큼 잘 나타냈던 경우가 있을까. 무성영화의 영웅들은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했고, 일부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영화 속 인물들의 매력이 제대로 드러나는 순간은 그 시대 카메라 안에서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스크린 밖에선 활기를 잃고 길을 헤매는 것처럼 보인다.
감독 자신만의 영화사를 아로새긴 엔딩 몽타주
매니가 관객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바빌론’의 마지막 장면은 당혹스럽지만 감격적이다. 감독은 끊임없이 오마주한 ‘사랑은 비를 타고’ 외에 흑백의 스펙터클 ‘안달루시아의 개’와 '설리번의 여행', 클로즈업의 미학 ,잔 다르크의 수난'과 ‘비브르 사 비’, 그리고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터미네이터2'와 ‘아바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화의 순간을 이어 붙이며 자신만의 영화사를 스크린에 아로새긴다. 지금까지 존재해왔고 앞으로 존재할 영화란 것에 대한 과격하고도 무차별적인 헌사. 수많은 이들이 영화란 소용돌이에 삼켜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영화로 남아 있고, 관객 역시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영화의 일부가 된다고 말한다. 마치 영화 속 대사처럼. “당신의 시대는 갔지만, 당신의 재능으로 빚은 영화는 천사의 영혼처럼 영원히 살아있을 테니.”
<이마 베프>
27년 만에 국내에 처음 개봉하는 ‘이마 베프’는 ‘영화에 관한 영화’의 명작으로 올리비에 아사야스를 세계적 감독으로 올려세운 작품이다. 홍콩의 스타 배우 장만옥(장만옥)은 쇠락한 누벨바그 감독 르네 비달(장 피에르 레오)로부터 무성 뱀파이어 영화 리메이크의 주연으로 캐스팅돼 파리에 온다. 그러나 감독은 무력감에 빠졌고, 스태프들은 영화가 잘 안 될 거라며 자조하고 분열한다. 프랑스 예술영화란 기대와 달리 영화 속 뱀파이어 복장은 할리우드 영화 ‘배트맨2’의 캣우먼 이미지를 참고하고, "영화는 마법이 아니라 기술"이란 주장이 거세게 몰아친다.
인터뷰하러 온 프랑스 기자와 장만옥의 충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기자는 “예술영화는 지식인을 위한 자기 만족적 영화일 뿐 대중을 위한 게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할리우드 액션영화를 찬미한다. 장 끌로드 반담 화이팅. 장만옥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극장에서 한 가지 스타일의 영화만 튼다면 결국 질려버릴 거예요!”
영화의 마지막, 감독의 편집본이 스크린에 영사되면서 영화는 다시 예술이란 영원의 자리로 돌아온다. 우격다짐으로 이어 붙이고, 이상한 손질을 가한 필름 속 장만옥의 이미지는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반짝인다. 영화적 체험이란 스크린을 통해 이미지를 느껴야 이뤄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영화가 있는 한, 어둑한 극장은 여전히 관객을 기다린다. 빛의 세계로 인도할 채비를 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