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름을 멈추고 돌아볼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모퉁이를 돌자, 시야에 불쑥 들어서는 가로수 한 그루. 할머니였다.
“지금 몇 시예요?”
“아홉 시 오십 분입니다.”
출근길 마음이 바빠 무심코 대답했다. 서두른 말투가 마음에 걸려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본다. 스쳐 지나칠 뻔했던 그 짧은 틈새로, 예기치 못한 온기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할머니의 발걸음은 잰걸음이다. 바짝 마른 몸에 제법 큰 키. 손에는 메모지 같은 무언가를 꼭 쥐고, 구부정한 어깨에는 작은 배낭이 얹혀 있다. 비가 갠 뒤라 길은 아직 젖어 있고 발밑이 불안하다. 혹여 넘어지실까 조마조마하다. 아마도 바삐 돌봐야 할 누군가가 기다리는 듯하다.
나 또한 요즘 마음이 바쁘다. 마음속에 뿌연 안개가 끼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운동화를 잘 신지 못한다. 답답한 마음이 발끝까지 전해지는 듯 걸음이 무겁다. 사방이 트인 슬리퍼를 신으면 바람이 스며드는 듯 시원하다. 그러나 젖은 길에선 삐끗삐끗 미끄러지려 한다. 조심조심 걷다 보니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는다.
어젯밤은 새벽 두 시를 훌쩍 넘겼다. 1단계 실습 과제 마감이 눈앞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 교수님은 지금까지 배운 것을 토대로 실습하면 되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나 또한 시간만 조금 더 내면 되겠다고 여겨 안도했다. 그러나 스터디에서 흘러나온 '실습이 가장 힘들었어요!'라는 한마디는 먹물 방울이 되어 마음속에 떨어지자마자 순식간에 번졌다. 나의 안도감은 삽시간에 까맣게 물들었고, 부담감은 몸에 맞지 않는 무거운 외투가 되어 나를 짓눌렀다.
나의 실습 대상, 서준*은 언어가 서툴다. 첫 만남에서 그는 너무나 똑똑해 보여 무엇이든 다 알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서준에게는 뇌의 각 지역을 잇는 정보의 길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생각이 언어를 미처 만나지 못하고 흩어지곤 한다. 언어의 장벽은 베를린 장벽처럼 높아, 다른 재능들까지 가려 버린 듯했다. 그럼에도 순간 스친 눈빛만은 맑고 단단했다. 그 눈빛이 나를 오래 붙잡아 두었고, 내 마음에는 한 단어라도 피어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차곡차곡 쌓였다.
서준은 음악과 춤을 좋아한다. 노래를 들으며 춤을 추다가, 기분이 좋은지 내게 와락 안긴다. 말 대신 전해오는 서준의 온기는 그 어떤 단어보다 따뜻함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완벽한 문장을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서준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내 아이를 키울 때를 떠올려 본다. 달력을 보며 숫자를 가르치고, 작은 가게에서 그림책을 사주기도 했다.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하다.
연필 쥐기도 어려운 서준. 책상 위에 스케치북을 펼쳐 놓고, 작은 의자에 앉힌다. 막 일어서려는 찰나, 서준의 손에 색연필을 쥐여 주며 그 손을 잡고 숫자 1을 그려 본다. “참 잘했어요!” 피드백을 건네고 곧장 음악을 틀어 함께 춤을 춘다. 서준의 웃음소리는 닫힌 내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한 줄기 햇살 같았다. 그 순간, 나의 하루도 환히 빛났다.
은근슬쩍 서준의 손에 다시 색연필을 쥐여 준다. 손을 잡고 세모를 그리는 순간, 색연필 끝에서 시작된 작은 진동은 서준에게서 나에게로, 나에게서 서준에게로 오가는 가장 투명한 언어가 되었다. 하지만 서준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좋아하는 짐볼 놀이로 향한다. 웃으며 뛰노는 서준을 따라 한참 웃다 보면, 다시금 색연필을 들려줄 용기가 생긴다. 손가락에 힘이 없어 글씨 쓰기를 싫어하는 건 아닌지 살핀다. 선 긋기와 색칠로 힘을 조금씩 길러 주려 한다.
오늘은 백분의 일. 내일은 백분의 이. 작은 반복의 순간들이 눈꽃처럼 차곡차곡 쌓여, 언젠가 서준이 스스로 숫자 1을 쓰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서준을 이해하기 어려운 혼란 속에서도 나는 길을 찾고자 한다. 서준의 눈빛과 함께 나눈 웃음 속에서, 언어 너머의 소통을 배우며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나의 화양연화다.
만약 할머니께서 다시 ‘지금 몇 시예요?’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어르신, 잠시만요!”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 상냥하게 시간을 알려드린다.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시라는 안부와 함께 온기가 스며들기를 바라본다.
할머니의 걸음에도, 서준의 오늘에도, 그리고 나의 숨결에도.
작은 틈새로 고요히 스며드는 달빛처럼 화양연화로 깃들기를 그려본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지명은 가명이며, 일부 내용은 각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