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를 담다

길은 누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을 딛는 순간 생겨난다

by 달빛

고요는 나를 가장 깊이 바라보게 한 시간이었다.

책에 질문을 던지고, 부모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는 마침내 나 자신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스무 살 무렵, 나는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 그저 되는 대로 공부했고 착하게 살아왔다. 그래서였을까. 정작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다. 책상 의자에 앉아 있는 나, 친구 따라 길을 걷는 나, 버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나. 그 모든 모습은 방향을 잃고 떠도는 듯했고, 나 자신에게조차 어색하고 낯설기만 했다.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말 이 길이 맞는 걸까?’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하고 싶은 걸 해. 너 자신을 믿어.”

하지만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나에게, 그 말은 오히려 더 막막하게 느껴졌다.


돌아보면, 위로는 늘 곁에 있었다.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조용히 받쳐준 사람들. 그 이름을 나는 이제야 제대로 부르게 되었다. 주말이면 마당에 가마솥을 걸고 장작불을 지펴 닭백숙을 끓이며 나를 기다리던 할머니. 낮은 점수를 받은 시험지를 괜찮다며 건네던 엄마. 든든한 맏딸이라며 무조건 지지해 준 아버지. 친구들 앞에서 나를 자랑삼아 불러주던 동생들. 그 모든 사랑이 내가 흔들릴 때마다 나를 지탱해 준 힘이었다.


나는 그저 나보다 먼저 길을 걸어간 이들의 발자국을 따라 나아갔다. 부모, 선배들, 책 속 인물들. 누군가는 한 길을 묵묵히 걸었고, 누군가는 길을 바꾸며 자기만의 답을 만들어 갔다. 그 흔적을 따라 나도 한 걸음씩 내디뎠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조용히 책을 펼쳤다. 그곳에서 만난 문장들이 내 마음을 조용히 두드렸다.

“네가 진짜 원하는 건 뭘까?”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오래 머물렀고, 그 시간이 나를 서서히 바꾸기 시작했다.


전혜성 박사의 『섬기는 부모가 큰 사람을 만든다』를 읽으며 알게 되었다. 진짜 부모란 앞장서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할 때 어깨를 내어주고,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묵묵히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섬김은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고 믿는 가장 강한 방식이었다.


전혜성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 아이만 잘 되면 된다는 이기심으로는,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에게 말했어요. ‘혼자 공부하지 말고,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 함께 공부해라.’ 집이 비좁은데도 친구들 책상까지 들여놓다 보니, 어느새 책상이 18개가 되었더군요.”


남을 돕고 베푸는 과정에서 아이는 스스로 힘과 지혜를 얻게 된다는 가치를, 그녀는 삶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말보다 앞선 삶, 그것이 그녀가 보여준 섬김의 본질이었다.


그 가치는 나에게도 스며들었다. 정답만을 강요받던 시절, 공부는 나를 가두고 옥죄는 단단한 성벽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 혼자 잘되기 위함'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나누기 위한' 공부의 가치를 발견하자, 비로소 철옹성 같던 마음의 빗장이 풀렸다. 이제 공부는 생각을 키우고, 관찰하며 선택하는 힘을 기르는 과정으로 여겨진다. 더는 시험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나를 들여다보는 하나의 통로가 되었다.


고요 속에도 길은 있었다. 모든 소음이 꺼진 밤, 창밖 어둠을 바라보며 혼자 남겨진 느낌이 들 때, 오히려 나는 나와 가장 가까워졌다. 그 침묵 속에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마주 보았다. 그제야 나는 내 안의 나와 처음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삶은 반복에 익숙하다. 익숙함은 달콤하고 안전하다. 하지만 너무 오래 머무르면, 그 안락함은 나를 잠재운다. 변화 없는 평온함에 취해 있다 보면, 어느새 성장하려는 의지마저 무뎌지기 마련이다. ‘미지근한 물에 개구리를 넣고 천천히 끓이면,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말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는다.

"나는 지금 어느 지점에 서 있는가?"


안락함이라는 온수에 몸을 맡긴 채 잠들 것인가, 아니면 차가운 공기를 마주하더라도 물 밖으로 뛰어오를 것인가. 나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 비로소 그 뜨거운 질문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나는 안다. 길은 누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을 딛는 순간 생겨나는 것이라는 걸. 조용히 걸어가며, 때로는 멈추고, 다시 생각하며,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며 만들어 가는 것. 누군가의 길을 따라가면 편하다. 하지만 나 또한 누군가에게 편안한 길을 내어주는 존재가 된다면, 그 또한 참으로 멋진 삶이 아닐까.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이, 사실은 내 길이 시작된 자리였다. 고요는 멈춤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이 다시 숨 쉬기 시작한, 조용한 ‘틈’이자, 내가 나에게 건네는 가장 진솔한 고백이었다. 그 틈 사이에서 나를 이해하려 애썼고, 비로소 나를 믿기 시작했다.


고요는 책을 통해 질문하고, 부모의 삶을 통해 답을 얻으며, 마침내 나 자신을 마주하게 한 귀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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