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움이 사랑인가 봅니다
밥 한 그릇에 오래 쌓인 손길이 담겨 있다.
무 달인 물로 지어 맛이 더욱 깊다. 뿌리채소 영양밥이다. 연근, 우엉, 고구마, 강낭콩에 흑미까지 풍성하다. 밥공기 모양의 포장으로 아주 섬세하다. ‘솥반’이다. 뚜껑 포장을 조금 열어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2분 만에 갓 지은 밥으로 따끈하다. 기업은 이 밥 한 그릇을 위해 얼마나 연구했을까. 영양밥과 뿌리채소의 비율이 황금률이다. 연근이 더 많거나 우엉이 더 많거나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다. 강낭콩과 팥도 조화롭다. 찹쌀과 멥쌀, 그리고 흑미와도 찰떡궁합이다. 아버지께 지어드리고 싶은 밥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면 소재지로 가게 되었다. 30리 먼 길이라 자취를 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경운기에 가재도구와 땔감을 싣고 오셨다. 자취방에 간단한 짐을 넣어두고 부엌 안쪽에 땔감을 내렸다. 맨 먼저 아기자기한 까만 솥을 아궁이 위에 걸어야 했다. 아버지는 흙을 물에 개어 솥 크기에 맞게 잘 고정시켰다. 질척한 흙이 솥 테두리를 메우며 내는 둔탁한 소리, 그 사이로 아버지의 거친 손마디가 바삐 움직였다.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한 번에 아귀가 딱 맞았다. 이제 처음으로 밥 지을 차례가 되었다.
수돗가에서 쌀을 씻어 오는 동안 아버지는 불 피울 준비를 하셨다. 집에서는 엄마가 밥을 지을 때 아버지가 도와주시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어린 딸에게는 다정하셨다. 쌀을 안치고 뚜껑을 닫았다. 중요한 건 나도 아버지도 밥을 지어 본 적이 없다. 두 사람은 웅크리고 앉아 땔감 잔가지를 더 넣어야 할까, 그만 넣어야 할까를 상의한다. 아궁이 속에서 넘실거리는 주황빛 불꽃이 아버지와 나의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밥물이 포르르 끓는다.
"아버지, 여기서는 아궁이에 나무를 더 넣으면 안 되지요?"
잔불로 밥에 뜸을 들인다.
아버지는 딸이 처음으로 지은 밥이 궁금하신지 약간은 상기된 얼굴이시다. 엄마만큼은 아니어도 자신 있었다. 엄마가 알려주신 대로 손등으로 물 눈금도 정확하게 했다. 불 조절도 잘했고, 뜸도 잘 들였기에 고슬고슬 달짝지근한 쌀밥을 맛나게 드리리라. 뚜껑을 여는 순간 탄내가 코끝을 스민다. 아버지 밥그릇에 탄 밥이 들어가지 않게 위에만 조심조심 뜬다. 밑에 탄 밥은 내 그릇 밑으로 숨기고 위에는 타지 않은 밥으로 살짝 덮었다.
모서리가 닳은 라면 상자에 해진 보자기를 덮으니 예쁜 밥상이 되었다. 지금의 번듯한 식탁보다 훨씬 견고하고 따스한 마음의 자리였다. 아버지는 딸이 지은 밥이라 더 달게 드시는 것 같았다. 아버지랑 단둘이 마주하는 밥상은 처음이라 어색하기도 좋기도 했다. 절반쯤 드신 아버지가 숭늉을 찾으셨다. 난감했다. 이제 밥이 탄 게 탄로 날 위기다. 부엌으로 가다가 옆을 보니, 주인집에서도 식사 중이다. 숭늉 한 그릇을 얻었다. 아버지는 벌써 식사를 다 마치셨다.
"오늘 밥맛이 최고더라."
아버지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흐뭇해하셨다.
남은 밥을 먹는데, 아뿔싸! 아버지가 나의 탄 밥으로 바꿔 드셨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고소한 밥을 만난 듯 탄 밥을 꼭꼭 씹어 삼키셨다. 수줍은 나는 어찌 밥을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유년의 기억이 이젠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라면 상자에 보자기를 씌운 것보다 훨씬 예쁜 식탁이다. 탄내가 나는 쌀밥보다 온갖 영양이 들어간 ‘솥반’이다. 한 숟가락 먹는다. 입은 옛 밥보다 맛있는데, 속은 어찌하여 허전하다. 남은 밥에 아버지가 좋아하는 파김치를 넣어 비벼야겠다.
파김치를 송송 썰어 참기름과 통깨를 넣는다. 고춧가루도 약간 넣고 꿀도 살짝 뿌린다. 양손에 숟가락을 쥐고 두 손으로 비빈다. 빈 방 안에 숟가락과 그릇이 달그락 부딪히는 소리만 가득하다. 아버지 한 숟갈, 나 한 숟갈 주거니 받거니 홀로 장단이다. 그리움이 사랑인가 보다.
"아버지, 오늘 밥맛이 꿀맛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