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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짓는사람 May 28. 2023

벽을 만들고 세우며.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

영화를 만들며 알게 된 한 사람을 인간적으로 좋아했고 그가 만든 영화도 좋아했다. 그를 꽤 신뢰하고 의지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것이 산산조각 났다. 처음에는 믿고 싶지 않았고 그냥 없었던 셈 치고 넘어가려 했었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 딱 1년 후, 나는 고소를 결심했다. 그 후로도 다시 1년, 완벽한 증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있고 가정을 꾸렸다는 말 같잖은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고 긴 소송 과정은 끝이 났다.

처음에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잠도 잘 자고, 사회생활도 무리 없이 하고 있고, 밥도 잘 먹었다.


하지만 자꾸 뭔가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방금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하고, 똑같은 말을 몇 번씩 반복했다. 어느 하나 집중 할 수 없고 계속 정신이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느낌이었다. 내가 허공에 둥둥 떠있는 것만 같았다. 감각은 점점 무뎌져서 어떤 것을 봐도 재미있지도, 슬프지도 않은데 어느 순간 갑자기 이상한 곳에서 눈물이 터지기도 했다. 사소한 일 하나 처리하는 것도 숟가락으로 바위를 옮기는 것 마냥 한없이 버거웠고 별 것 아닌 일에, 그냥 모든 것을 끝내고 싶기도 했다. 상담 선생님은 나의 상태를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즉 PTSD 증상으로 진단했다. 그 진단을 듣고도 나는 ‘그래도 나 정도면 힘든 거 아니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 만난  얼마 되지 않았지만  좋아하던 친구가 나에게 조심스레 고백했다.    나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고, 그것을 고소하려고 한다고.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하고 내려앉았다. 나의 기나  소송 과정들이 머릿속으로 스쳤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안 돼…


그 기억은 명백하게 고통이었다.

고통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그것은 다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가 없는, 고통 그 자체였다.

참 이상했다. 나의 일이었을 때는 끊임없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했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겪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니 너무너무 끔찍해지기 시작했다.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고, 괜찮은 게 아니었다고. 사실 나는 너무너무 힘들었다고. 그 사건은 신뢰하던 한 사람을 잃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던 영화를 잃는 일이었고, 독립영화 씬에 대한 애정을 잃는 일이었다.


괜찮지 않은 나를 처음으로 똑바로 바라보았다. 거기엔 사람을 믿지 못하는 내가 있었다.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내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피해, 집을 짓기 위해, 시골로 도망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인생인 걸까? 우습게도 오히려 여기서 더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게 되었다. 하긴. 나 같은 초보가 어떻게 혼자서 집을 짓겠는가. 하나부터 열까지 필연적으로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건축학교의 두 작가님은 물론이고 스텝분들, 조합원 분들까지 모르는 걸 질문하고 힘든 일에 지쳐있을 때마다 손을 내밀어주셨다.

어디 그뿐일까. 집 짓는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와준 건축학교 동기인 희주 언니와 광섭님. 그리고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친구들. 일면식도 없는데 바퀴 달린 집이 궁금해서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짬짬이 달려와 일해주신 박기영 대표님과 도와주러 왔다가 티비 출연까지 같이 하게 된 레이린과 수탉님. 고소공포증이 있어 높은 사다리에 올라가지 못했는데 그걸 모두 대신해주신 범진쌤, 지금까지도 마감에 대한 고민을 나누며 함께 일해 주시는 창수쌤까지. 적다 보면 끝도 없다.


사람들을 등지려 했던 마음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제천살이에서 나는 참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그리고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나 혼자서는 벽 하나도 세울 수 없었음을. 물론 네 개의 벽을 만드는 건 혼자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벽을 세워서 결합하는 건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많은 사람들이 힘을 보태서 벽을 세운 뒤 바닥과 또 다른 벽을 결합하여 고정시켰다. 튼튼한 바닥 위에 네 개의 벽이 서니 그것만으로도 공간 하나가 만들어진 것 같았다. 안에 들어가 있으면 아늑하고, 편안했다. 조금씩 집의 형태가 갖추어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웠던 순간에도 내 곁을 지켜준 사람들이 있었다. 함께 살며 나의 모든 예민함과 우울을 그대로 흡수했음에도 끝까지 나를 버리지 않고 다독여준 한 사람, 말하지 않아도 이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하기에 고립의 순간에서 나를 꼭 끌어내준 친구, 문제 제기부터 소송까지 내가 차마 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을 대신해주신 활동가분들, 외로웠던 법정 진술과정에 유일하게 함께 해주신 변호사님들, 그리고 나의 상태를 걱정하시며 상담을 무료로 지원해 주신 상담 선생님까지. 그 당시엔 나 스스로도 버거워서 그 마음들에 대해 곱씹어 볼 여유조차 없었는데 지금은 생각한다. 그 소중한 손길들이 그때의 나를 지킨 것이라고. 나는 참 운이 좋았다고.


이때쯤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너무 힘이 들어서 이제는 그냥 사람들을 좋아하기로 했다고. 그러기로 결심했다고.

이런 결심을 하지 않으면 집을 지을 수가 없었으니 어쩌면 조금은 이기적이고 비겁하기도 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다 떠나서 나는, 집 짓기를 도와준 많은 분들을 통해 큰 위로를 받았다. 상처받았던 나의 마음들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회복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사람을 미워한다고 해도, 어찌 그 사람들의 호의를 의심할 수 있겠는가. 어찌 그 순수한 마음을 튕겨낼 수 있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감사히 받으며 언젠간 내가 그 마음들을 다시 돌려줄 수 있는 큰 사람이 되길 간절히 바라는 것뿐이었다. 더 크고 단단한 내가 되어,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 수 있길. 나를 지켜 줬던 그 사람들처럼 나도 누군가의 단단한 벽이 되어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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