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와 징크스

엘지트윈스 팬이어서 행복한 날

by 낮별

2년 만의 엘지 통합우승의 순간을 혼자 집에서 맞이했다.

남편은 태국 출장 중이고, 큰 아이는 일요일에 있을 시험 때문에 경기를 챙겨 볼 여유가 없는 상황이고, 작은 아이는 수학 학원 수업 있는 날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족 단톡방에 라이브로 경기를 못 보는 불쌍한 이들을 위해 실시간 문자중계를 하면서 혼자 난리부르스를 떨었다.


혼자 티브이 앞에 앉아 작은 아이가 먹다 남기고 간 오므라이스를 마저 긁어먹으며 경기를 지켜보았다. 맥주라도 한 캔 꺼낼까 하다 3차전에 맥주를 꺼내 마시다 경기가 뒤집어졌던 걸 떠올리고 꾹 눌러 참았다. 야구경기를 관람할 때는 이상하게 징크스를 믿게 된다. 남편의 경우에는 실내 바이크를 타며 관람하는 날은 이기는 날이 많다며 야구를 보며 운동을 하는 것이 루틴이 되었다. 예전에 인강으로 들었던 심리학 교수님이 유독 야구라는 스포츠가 징크스가 많은 종목이라고 했다. 그 이유로 게임수가 많은 데다 게임 시간도 길고, 경기 중에 멈춰 서서 이것저것 반추할 시간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축구나 농구처럼 스피디하게 진행되는 종목들은 그럴 여유가 없다. 야구는 타석에 서있을 때에도, 마운드에 서있을 때에도, 진루하여 베이스에 기다리고 있는 순간에도, 수비하며 서 있는 시간에도 생각할 시간이 넘치도록 많은 것이다. 넓은 야구장에 자신의 포지션이 정해져 있으니 홀로일 수밖에 없다. 이런 종목의 특성으로 야구 선수들은 타격과 투구에 대한 온갖 징크스를 만들어낸다.


재미있는 건 선수뿐만이 아니라 팬들도 그러하다. 내가 맥주 캔을 꺼내려다 말고 3차전이 생각나서 자제했던 것처럼, 팬들의 온갖 징크스가 출몰한다. 한국시리즈 동안 와이프가 화장실에 갈 때마다 점수가 났다며 오늘은 와이프를 화장실에 가둬놨다는 웃픈 얘기도 들렸고, 치맥을 먹어야 이긴다며 물리지만 며칠째 치맥만 먹고 있다는 얘기도 들렸다. 자신이 직관하면 지는데 그걸 무시하고 직관 갔다가 역시나 졌다며 사과의 글을 올리는 이도 있었다.


어쨌거나 내가 맥주를 꾹 참은 덕에 엘지는 우승했고, 오늘 저녁에는 출장에서 돌아올 남편과 늦은 축배를 들어야겠다. 혼자 봐서일까, 아니면 그다지 힘겹게 이긴 경기가 아니라서일까, 미리 우승을 강하게 예견하고 있어서였을까, 우승의 순간이 예상보다 무덤덤했다. 우승 세리머니를 보며 눈시울이 살짝 뜨거워지기는 했지만 2년 전처럼 그렇게까지 미치도록 행복하지는 않았다. 우승도 습관이라더니 어느새 익숙해진 걸까?ㅎㅎ


엘지 야구에 입문한 1998년 이후 응원하다 실망하고 지쳐 떨어지고 야구를 외면하며 살았던 날이 많았다. '무적엘지'라는 구호가 부끄럽게 느껴졌던 날들이었다. 이젠 명실상부 '무적엘지'임을 입증하였다.

스토브리그 동안 내부 FA 선수들 잘 잡아서 박해민과 김현수가 엘지에서 은퇴하는 것을 보고 싶다. 최근 엘지에서 내 최애선수는 주장인 박해민이다. 내가 유니폼에 이름을 새기면 다른 팀으로 이적해 버리는 징크스가 있어서 차마 이름을 새기지 못한 선수이다. 내가 꾹 참고 이름을 새기지 않았으니 어디 딴 데로 안 갈 거라고 믿는다. 예전 최애 선수였던 채은성, 내가 유니폼에 이름을 새긴 탓에 한화로 가서 어제 마지막 아웃카운트의 재물이 되었다. 우승했는데 그건 또 어찌나 슬프던지... 왜 하필 은성이야...ㅠㅠ


올 한 해도 엘지덕에 많이 웃고, 울고, 즐거웠다. 고맙고 사랑한다, 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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