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태풍상사' 시절

20년 만의 만남

by 낮별

영화 <어디 갔어, 버나뎃?> 속에서 주인공이 20년 전 직장동료를 만나 부둥켜안고 반가워하는 장면이 있었다. 순식간에 20년 전으로 돌아가 20년의 시간적 거리, 떨어져 살았던 공간적 거리를 무색하게 할 만큼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장면이 아주 인상적으로 느껴졌던 건, 내가 곧 20년 전의 직장동료들을 만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학 졸업 후 1996년부터 2005년까지 몸 담았던, 내겐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 일해 본 것이 그곳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곳이었다. 소수였던 여자 직원들끼리는 지금까지도 일 년에 한두 번 연락을 주고받으며 인연을 유지해 왔지만 그곳의 다수를 차지했던 남자 직원들과는 퇴사 후 인연이 끊어진 상태로 20년이 흘렀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모두 퇴사를 해서일까, 어쩌면 그 둘 다이겠다. 회사를 나와 창업을 하고 어느 정도 단단한 기반을 잡아 한 회사의 어엿한 대표이사가 된 그 시절 타 부서 팀장님이 사람들을 모았다. 갑작스러운 소집 제안에 얼떨떨하면서도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제 와서 굳이? 뭣 하러? 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만나면 몹시 반가울 것도 같았지만 지금에 와서 그 사람들을 다시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20대, 30대 젊었고 예뻤고 머리가 팽팽 돌아갔던 우리들의 리즈시절을 기억하고 있을 텐데, 구태여 50이 넘어 늙고 못 생겨진 모습으로 기억을 리셋시킬 필요가 있을까 근심도 되었다. 하지만 호기심과 반가움이 그 근심을 이겼고, 어제 우리는 모였다.


요즘 드라마 <태풍상사>를 보면서 나는 그 시절이 자주 떠오르곤 했다. 버튼이 빼곡한 인터폰 전화기, 팩스 같은 사소한 사물들, 드라마 전반에 깔려있는 그 시절의 분위기도 그렇게 만들었지만, 여자 주인공인 '오 주임'이 호명될 때마다 함께 일했던 '오 주임' 언니가 강제 소환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 즈음이라 이 소집이 반갑기도 했다. 20년 만에 마주한 사람들은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머리숱이 조금씩 줄어들었고, 몸집이 조금 커지기도 하는 등 저마다 변해 보였지만, 목소리나 말투는 예전 그대로였다.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다 보니 타임머신을 타고 20년 전으로 훌쩍 날아가버린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도 그 시절 나를 울렸던 이들은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다. 아무런 원망도, 미움도 남아있지 않은 사람들끼리 만났다. 뻔하게도 옛날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깔깔대며 웃었다.


1차 한우와 2차 카페까지 돈을 한 푼도 못 쓰게 하신 잘 나가는 대표님은 헤어질 때 택시비라며 현금까지 챙겨주셨다. 극구 사양해도 그 시절 여러분이 도와주셔서 이렇게 자신이 자리를 잡았다며, 정말 고맙다며 기어이 챙겨주셨다. 이러지 마시라며 나는 말했다. "한 번 주시면 계속 주셔야 합니다."

"일 년에 한 번씩은 얼굴들 보자고" 하시는데, 내가 그랬다. "왜요? 더 자주 보면 안 돼요?" 모두가 웃었다.


많이 웃었고, 많이 웃겼다. 사람들이 나를 보며 놀라기도 했다. "김 대리 저렇게 웃긴 사람이었어? 업무적으로 만났을 때는 깐깐해서 무서웠었는데." 나를 좀 더 알던 사람들은 원래 그때도 사석에서 만나면 웃긴 사람이었다고 했다. 나는 이런 말들을 들으면서 다시 생각했다. 내가 웃긴 사람이구나. 그랬구나.

욕구 프로파일 검사에서 즐거움에 대한 욕구가 높이 나온 것이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대화와 대화 사이 말이 뜬 시간, 그 시간의 어색함을 견디기가 힘들다.

더 견디기 힘든 건 만남이 즐겁지 않은 시간이다. 불편해지는 걸 참을 수 없다.

별말 없이 가만히 있어도 편안한 사이가 되기 전까지는 늘 그랬던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이일수록 단단히 마음먹고 나서야 한다.

그래도 자랑질하는 걸 견디기보다는 '그땐 그랬지'로 웃고 떠드는 편이 훨씬 즐겁다.


웃고 웃기느라 진이 빠져서 남편이 데리러 온 차 안에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이고, 지친다"

'그땐 그랬지'로 웃고 떠들고 하는 건 즐겁긴 해도 에너지 소모가 많이 되는 일이다.

한우와 맥주로 채운 밤이었지만, 아침에 일어나 몸무게를 재어보니 최근 들어 가장 낮은 숫자가 떴다. 오!


몹시 반갑고 즐거웠지만, 지나간 인연은 지나간 대로... 현재의 삶에 다시 자리 잡게 하고 싶지는 않다.

더 자주 보자고 실없는 소리를 했지만 사실 일 년에 한 번도 과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만나 어제 했던 그런 시시껄렁한 얘기들을 또 처음인 냥 주고받겠지. 시절인연은 시절인연으로 의미 있는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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