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나를 처량하게 만들었다

지루함을 견딜래? 스트레스받을래? (feat. SFBT)

by 낮별

어제저녁 학교에 가려고 지하철역에서 나와 걸어가고 있는데 몹시 추웠고, 배가 고팠다. 생각해 보니 오후에 집에서 군고구마 두 개 먹은 게 다였으니 출출할 만도 했다. 시계를 보니 수업시간까지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고, 지나며 봐둔 잔치국수 우동을 간판에 앞세운 가게 안으로 용기를 내어 들어갔다. 실내에는 일행이 꽤 여럿인 팀이 한쪽 테이블을 차지하고 술판을 벌여놓고 있었다. 주인이 안내해 준 대로 주방 바로 앞 구석진 2인 테이블에 앉아 잔치국수를 주문했다. "잔치국수는 오래 걸려요." "우동은요?" "우동은 금방 나와요." "그럼 우동 하나 주세요." 금세 나온 뜨끈한 우동 한 그릇을 앞에 두고 문득 창밖을 보니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첫눈 오는 날, 혼자 우동 한 그릇! 기분이 야릇했다. 소주 한 잔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수업에 들어가야 하고, 수업이 없었더라도 나 혼자 소주를 시킬 용기는 도저히... 아직 그 정도까지는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잠시 후, 땡그랑 종소리가 울리더니 한 무리가 요란하게 들어왔다. 이번엔 여섯 명. 김 부장, 송 과장, 정대리들이 섞여있는 회사원들이었다. 그들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사장님, 맥주 두 병, 두부김치 하나 주세요"라고 외쳤다. 나는 우동 그릇에 얼굴을 박고 '여섯이 와서 맥주 두 병, 두부김치 하나가 뭐야?'라고 속으로 구시렁대고 있었다. 그다음 나온 말이 더 가관이었다. "사장님, 두부김치 주실 때 고기 많이 주세요." 두부도 아니고 김치도 아니고 자그마치 고기를 많이 달라니... 그 주문을 주방으로 전달하자 갑자기 주방이 조용해졌다. 들리진 않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눈빛으로 욕하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후 고기 많은 두부김치를 주문한 테이블에서 이건 아니다 싶었던지 "돼지 불고기 하나 추가 할게요"라고 했다. 그제야 주방에서 "네!" 씩씩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우동을 초고속으로 들이키고 가게를 나왔을 때에도 눈은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첫눈이구나! 가족 단톡방에 첫눈 소식과 함께 혼자 먹은 우동맛을 전했다. 큰 아이가 "엄마, 진짜 대학생 같네, 혼밥도 하고.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십숑"이라고 다정하게 챙겼다.


어제 수업에서 배운 이론은 해결중심치료(SFBT)였다. 문제보다는 해결에 초점을 맞추는 단기 치료 모델이다. 내담자가 이미 문제 해결에 대한 필요한 자원과 강점을 가지고 있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특별한 질문기법을 사용하여 해결 능력을 활성화한다. 특별한 질문 기법이라 하면 예외 질문(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던 때가 있나요? 그때는 어떻게 다르게 행동하셨나요?), 기적 질문(기적처럼 이 문제가 사라진다면 당신은 어떻게 달라질 것 같은가요?), 척도 질문, 강점 질문, 대처 질문 등이 있다. 수업 중에 역시 소토론을 진행했는데,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를 두고 해결중심치료의 질문들로 다뤄보았다.


현재 나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학업에 대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당장 닥쳐있는 것들을 처리하느라 스트레스이긴 하지만 기적질문을 내게 던졌을 때(그러니까 스트레스가 다 사라지고 나면 어떨 것 같냐는 질문),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또 다른 스트레스거리를 찾아 기웃댈 것 같아요" 이건 분명하다. 지루함보다는 스트레스가 견디기 낫다. 그리고 나의 강점질문과 대처질문을 물었을 때 나는 대답했다. "흥미 있는 과제를 할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서 하는 편이에요. 흥미 없는 과제는 너무너무 하기 싫지만요." 어떤 과제가 흥미롭냐고 되물어서 나는 요즘 정신없이 쓰고 있었던 영화 사례 보고서를 예로 들었다. 이번 주 내내 영화 사례 보고서를 쓰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성격심리학 과제도 꾸역꾸역 하고는 있는데 이건 정말이지 괴롭다고 말했다. 다른 분들도 대부분 현재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시험, 과제, 논문과 같은 학업 스트레스였고, 이런 질문들을 주고받으며 서로 으쌰으쌰 기운을 북돋워주었다. 강점질문과 대처질문에 대답할 때는 다들 표정이 밝아졌다.


수업이 끝나고 나왔을 때 세상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넘어질까 조심조심 걸어 지하철역까지 걸어가서 지하철을 타긴 탔는데 막상 내리는 역에 도착해 나오니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버스정거장에서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하나둘 걷기를 작정하고 떠나자 나도 머플러로 머리를 동여 메고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오늘 한없이 처량한 날이구먼' 혼자 먹은 우동 탓도 있고, 이 추운 날 한 밤중 인적이 드문 눈 쌓인 길을 엉금엉금 집까지 걸어가야 하는 신세인 탓도 있고... 한 학기가 끝나가는데, 이제 다음 주 시험만 보면 끝인데, 머릿속 혼돈은 여전하고, 동력이 몽땅 사라져 버린 것 같은 기분 탓이다. 수업 중에 SFBT로 치료를 받았어도 정말 단기로만 효과가 있는 건지 금세 까먹고 말았다. 동력을 다시 찾아야 한다. 그래서 방학 중 개설된 인문 상담 특강을 신청해야겠다 마음먹었다.


머플러를 칭칭 동여 감은 채 나타난 볼 빨간 갱년기를 맞이한 남편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성냥 팔다 왔어?"

당신이라도 웃겼으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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