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슬픔의 삼각형>
크루즈의 전복과 함께 섬에 표류하여 생존한 소수의 사람들의 위계 역시 전복된다. 에비게일은 먹을 것을 구하고 불을 피울 능력을 갖추었다는 이유만으로 크루즈의 화장실 청소부에서 권력의 최정점으로 이동한다. 크루즈 안에서 삼각형의 최정점에 위치해 있던 갑부들은 순식간에 삼각형의 바닥으로 추락한다. 권력을 잃은 사람도, 얻은 사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권력이 형성되는 과정이므로.
새로운 권력의 삼각형이 공고해졌을 때, 섬의 뒤편에서 발견된 진실, 무인도인 줄 알았던 섬이 사실은 리조트였다는 사실은 에비게일에게는 몹시도 불편한 것이었다. 다른 생존자들에게는 환호할 수밖에 없는 진실이었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권력의 정점을 경험하고 있는 에비게일에게는 리조트로 향하는 엘리베이터가 지옥으로 향하는 문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에비게일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청소부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이었기에, 그녀는 안도하고 기뻐하는 야야의 뒤에서 커다란 돌을 집어 들었다.
야야만 사라지면 자신의 권력이 유지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지만, 과연 그럴까? 야야가 죽어 없어지더라도 섬의 뒤편의 진실은 머지않아 밝혀질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돌을 집어 든 에비게일의 꿈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권력은 획득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렵고 중독적이라는 사실, 권력에 중독된 자의 어리석음에 눈이 멀어버려 내리는 판단오류,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목숨조차 이토록 가벼이 여기는 이기심. 돌을 집어 든 에비게일의 추악한 얼굴을 보며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옥상에서 화분을 집어 든 만수가 떠오르기도 했다.
한나 아렌트는 권력이란 자유롭게 행위하는 복수의 인간이 모여 행위를 통해 형성되는 현상이라고 보았다. 섬에서의 에비게일은 '능력'을 기반으로 정당한 권력을 가졌지만,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선택하려는 순간 그녀 역시 자신이 혐오했던 '포식자'들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에비게일은 과연 그 돌을 내려놓고 화장실 청소부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영화는 이런 질문을 던져둔 채 막을 내린다.
만수가 끝끝내 화분보다 끔찍한 짓을 자행함으로써 더욱 불안하고 불행해졌을 만수와 만수 가족의 삶을 떠올리며 찝찝하게 영화관을 나섰던 것을 기억하며, 에비게일이 그 돌을 얌전히 내려놓았기를 바란다. 살아도 제대로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욕망대로 그 일을 행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지옥으로 향하는 선택일 것이다. 다수가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권력의 법칙에 소수가 굴복하지 못한다면, 굴복하지 못한 개인에게는 재앙일 뿐이다. 역삼각형보다는 삼각형이 안정적이다. 비록 그것이 '슬픔의 삼각형'이라고 할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