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련복이 가져온 작은 파문
이틀 전 친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서로 안부를 주고받다가 영화가 보고 싶은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무슨 영화냐고 물어봤더니 "신명"이라고 했다. 나는 이 영화가 만들어진 취지는 이해하고 만든 사람들의 용기를 응원하지만 구태여 영화관에 가서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얼마 전 예매만 하고 관람은 하러 가지 않았었다. 개봉 초반에는 상영관 찾기가 힘들었는데 어느새 관객수가 손익분기점 30만을 훌쩍 넘기고 100만을 향해 가고 있다고 했다. 예매해 놓겠다는 친구의 말에 그래, 오랜만에 영화관 나들이 한 번 해보자며 응했다. 어제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영화는 예상대로였다. 천박하고 지저분한 스토리를 영화화하니 영화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보는 동안 속이 메스꺼웠다. 이 허황된 스토리가 100%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이 참담했다. 스토리의 얼개를 이어가는 큰 사건들은 모두 사실이고,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이야기는 허구를 기반으로 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 납득이 되려면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어야 했고, 제법 설득력이 있어 보였고 그게 답답하고 역겨웠다. 15세 관람가라는데, 절대로 애들 데리고 보지 마세요. 대학생 아들한테도 차마 보라고는 못 권하겠...
아무튼 영화는 그랬고, 친구와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어떤 대화 끝에 학창 시절 교련 수업 이야기가 나왔다. 심폐소생술을 배운 적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이어진 얘기였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교련 시간에 대충 흉내만 내본 기억이 있다고 했다. 나는 교련복을 입고 수업했다고 하니, 친구는 교련 수업조차 없었고 교련복은 구경도 못해봤다고 했다. 때는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이었다. 나는 경상도에서 학교를 다녔고, 이 친구는 경기도에서 학교를 다녔다. 지역마다 교련 수업을 다르게 실시했을까? 진위를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나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에 질문을 했고 친구는 그녀의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내 고등학교 친구들 단톡방은 난리가 났다. 그야말로 홍해처럼 갈라졌다. "교련 수업은 했지만 교련복은 입지 않았어", "야, 교련복 입었어", "교련복 입기 싫어서 안 가져갔다가 엎드려뻗쳐했던 기억이 선명한 걸", "교련복은 없었네요, 이 사람들아" 온갖 의견이 분분하던 끝에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나, 그 교련복 갖고 있어." 순간 정적, 한동안 조용해지더니 다른 친구가 말했다.
"그거 너네 언니 교련복 아니야?"
"그런가?"
미안하다. 친구들아. 날이 30도가 넘어가서 불쾌지수가 높은 날이었는데 내가 불을 질러놨구나.ㅋㅋㅋ
경기도에서 학교를 다닌 친구는 친구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니, 그 친구왈 남녀공학이었는데 남자애들은 교련복 입고 여자애들은 입지 않았다고. 교련 수업은 있었다고.
이런저런 의견을 취합해 보니 확실히 교련 수업은 있었고, 교련복을 입었는지 어땠는지는 미궁 속으로...
친구 말 따나 사진을 찍어 남겼어야 하는데... 교련복 입고 붕대감기 수업했던 기억이 선명한데...
이 사태를 만들어놓고 친구와 둘이 한참을 웃었다. "야, 진짜 기억이란 게 믿을 게 못되구나. 내 기억을 믿고 어디 가서 우겼다가는 큰일 나겠어. 앞으로는 이렇게 대답하자. 내 기억에는 그런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
92학번들, 혹시 고등학교 때 교련복 입어보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