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가 불러오는 풍경
요 며칠 에어컨을 켜지 않고도 살만한 기온, 살만한 습도였다.
엊그제 뉴스를 보다가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무더위'라는 말이 '물더위'에서 'ㄹ'이 탈락해서 만들어진 단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기상전문가가 나와서 이것을 설명해 주는데, 나는 굉장히 충격적인 느낌을 받았다. 50년을 넘게 살았는데 이걸 모르고 살고 있었다니... 그러니까 '무더위'란 그냥 높은 기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습도가 무지하게 높으면서 기온까지 높은 상태를 일컫는다는 것이다. 실내온도가 같은 28도인데 어떤 날은 못 견디겠고 어떤 날은 견딜만한 것을 보면서 의아해하다가 '문제는 습도야, stupid'를 깨달았다. 우리나라 여름이 유독 힘든 건 그야말로 '무더위'탓이다.
어젠 제법 선선해서 온종일 에어컨을 켜지 않고도 지낼 수 있었다.
오전에는 줌으로 영어 사설 읽기 스터디 모임을 가졌다. 탄핵이란 말이 뉴스에 도배가 되던 지난 1월에 작은 아이의 "엄마, 탄핵이 영어로 뭐야?" 하는 돌발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하고 어버버 했던 순간이 있었다. 아는데, 알고는 있는데 입에서 즉각 튀어나오지 않는 설단현상을 겪고 그 일화를 친한 쌤들께 들려드렸더니 "그래, 안 되겠다, 우리 다시 공부합시다" 이렇게 결성된 스터디였다. 그때부터 꾸준히 유지하고 있고 매주 사설 하나씩 읽으면서 여전히 읽기 속도는 안 나지만 다양한 주제를 접할 수 있어서 흥미롭다. 어제의 주제는 스테이블코인이었는데, 경제 바보인 나는 스테이블코인이 뭔지 이제야 감 잡았다. 새 대통령이 스테이블코인 어쩌고 저쩌고 공약을 내놓았을 때만 해도 관심밖의 일이라 생각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다. 약간, 아주 약간 똑똑해진 기분이 들었다.
저녁에는 에어컨을 틀지 않고도 집에서 음식도 만들어 먹었다. 보글보글 된장찌개도 끓이고, 제육볶음도 하고, 감자전도 부치고, 풋고추된장무침도 만들고, 샐러드도 만들어서 저녁 한상을 차렸다. 오랜만에 네 식구가 다 모여서 먹는 평일 저녁이었기에 주부만랩을 발휘해 봤다.
저녁을 먹고 주방을 치우고 유리창을 활짝 열어놓은 채 거실에 앉아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숲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환상적이었다.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게 적당한 빗소리.
아파트에 살면서 이런 환상적인 빗소리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잠자리에 들었을 때도 빗소리는 계속되었다.
눈을 감고 있으려니 어린 시절, 포슬포슬한 얇은 이불로 몸을 감싸고 마루에 앉아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며 빗소리를 하염없이 듣고 있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나는 어렸고, 젊은 엄마 아빠가 계셨던 그 날들. 비가 오면 엄마는 어김없이 부침개를 부치셨고, 온 집안이 고소한 기름냄새로 가득했다. 그러니까 그런 순간에 몸소 체득된 것들이다. 어제 같은 날, 기름냄새를 풍기기로 마음먹은 것, 빗소리를 즐기게 된 것, 사람이 그리워 지는 것. 그런 것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