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 야구를 못 끊어
요즘 매주 한 번씩 만들어 먹는 메뉴는 도토리 묵밥이다. 날이 너무 더우니까 뭔가 상큼하고 시원한 게 당기기도 하고 온 가족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물론 도토리 묵을 직접 만들어 먹는 건 아니다. 육수도 냉장육수를 사서 쓰니까 도토리 묵밥을 만드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묵을 길게 썰어서 오목한 그릇에 담고 그 위에 소금에 절여둔 오이(이것도 귀찮으면 그냥 생오이를 쓰기도 한다)를 꼭 짜서 올린다. 김치를 쫑쫑 썰어서 얹고, 참기름 한 바퀴 돌리고, 육수를 적당히 부어 김가루와 통깨를 얹으면 모양도 그럴듯하고, 맛도 제법 묵밥집에서 먹는 것과 유사하다. 묵을 먼저 먹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밥을 조금만 넣고 말아 먹어도 속이 든든해진다. 만드는 품은 라면만큼 쉬운데 아이들은 먹을 때마다 눈이 커진다. "너무 시원하고 맛있어"
어제저녁도 일찌감치 묵밥을 만들어 먹고 야구를 보고 있었다. 기아전이였다. 남편이 밖에서 저녁을 먹고 일찍 귀가해 함께 야구 경기를 집관했다. 남편은 실내 자전거를 타고, 나는 바닥에 앉아 소파에 기대고 앉아 있었다. 4:0으로 리드를 이어나가고 있어서 '오늘 경기는 수월하게 이기겠군' 방심하던 차에 4:1이 되더니 4:7로 역전이 돼버렸다. 남편은 자전거를 타면서 거칠게 열을 내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터져 나오는 '사랑의 욕'이 마구마구 이어졌다. 에어컨을 틀어놓고 가만히 앉아 있던 나도 훅 더워졌다. 역전당한 경기를 재역전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므로 이런 경기는 진짜 건강에 해로워하며 꺼버리는 편인데, 어제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보고 있었다.
9회 초, 내가 사랑하는 박해민이 주자 1,2루 상황에 타석에 들어섰다. 장타를 치는 선수가 아니라서 말도 안 되는 바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해민아, 홈런 한 방만 부탁해." 그 순간, 박해민이 친 공이 천천히 천천히, 이렇게 천천히 가면 뜬 공 아웃이 뻔한데 싶은 속도로 계속 계속 날아갔다. 홈런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자전거를 타던 남편도 자전거를 박차고 일어나 티브이 앞으로 뛰어왔다. 7:7 그 순간, 우리 부부는 축제의 도가니였다. 김현수의 추가 적시타로 재역전을 만들어냈다. 경기는 9:7로 승리했다. 이걸 이기네?
이래서 야구를 못 끊는다. 답답한 경기가 주는 스트레스도 크지만 일 년에 몇 번 없는 이런 짜릿한 경기를 보게 될 때 느껴지는 기쁨은 정말이지 자식이 올백 맞아 오는 것만큼(경험해 보진 못했지만 이런 기분일 것 같다) 크다. 도파민 대폭발이다. 어제 홈런을 치고 유유히 베이스를 돌아 홈으로 들어온 박해민은 덕아웃으로 가서 이전 이닝에서 주자를 쌓아놓고 역전을 당하도록 만든 두 명의 투수 이정용과 유영찬을 동시에 얼싸안고 기쁨을 함께 나눴다. 아, 이런 감동 때문에도 야구를 못 끊는다. 경기가 그냥 그렇게 저버렸다면 두 명의 투수의 마음은 지옥이었을 텐데, 홈런과는 멀어 보이는 주장 형님이 기적 같은 홈런으로 손수 해결해 주고 돌아와 두 투수를 안아주는 순간 모든 마음의 짐이 사라졌을 것이다. 셋이 얼싸안고 있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순간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
작은 아이가 초등부 야구 선수반 생활을 2년 정도 했었던 지라, 나는 특히 선수들의 좌절을 보면 마음이 한없이 약해진다. 선수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를 지켜보고 있는 동료들, 가족들 모두가 괴로운 순간인 걸 알아서다. 특히 패전투수로 마운드에 서있는 선수를 바라볼 때, 그가 느끼고 있을 외로움과 두려움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건 내가 응원하는 팀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큰 실수로 인해 경기 분위기가 바뀌었을 때 카메라는 계속해서 실수한 선수를 클로즈업한다. 방송 카메라 참 고약하다. 그 선수의 표정은 세상 침울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그런 표정을 보고 있기는 힘들다. 그래서 많은 야구 선수들의 부모들이 자식의 경기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한다. 아마 우리 부부도 아이가 계속 야구를 했다면, 지금처럼 홀가분하게 야구를 즐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좋은 야구를 말이다. 일찌감치 자기 갈길이 아니라며 포기해 주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기분이 너무너무 좋아져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맥주 한 캔을 따서 남편과 나눠 축배를 들었다.
이런 날은 마셔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