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욕망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어제 새벽 다섯 시에 남편을 배웅하고 그 길로 잠이 완전히 깨버렸다. 그래도 명색이 해외 출장 가는 남편을 얼굴은 보고 보내야지 싶어 새벽에 가기 전에 나를 깨우라고 당부해 뒀었다. 집을 나서기 직전에 내가 자고 있는 방문을 빼꼼 열고는 "여보, 나 갔다 올게" 인사를 하길래 벌떡 일어나 눈을 비비며 비몽사몽 문 앞까지 배웅을 했다. 얼굴은 보고 보내야지 싶었지만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눈이 안 떠져서...ㅋㅋ
남편은 박람회가 있어서 짧은 일정으로 방콕에 갔다.
그리고 나도 온종일 방콕이었다.
저녁에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려고 잠깐 분리수거장에 나갔다 온 게 전부였다. 분리수거를 하고 있는데 어느 집인지 변성기가 한창인 사춘기 아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아마도 분리수거장을 면하고 있는 저층 세대인 듯하고, 창문을 다 열어둔 상태이기 때문에 바로 옆에서 울부짖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아주 또렷하게 들려왔다.
"저는 한다고 하는데 엄마가 자꾸자꾸 더 많은 걸 바라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너무 버겁잖아요?"
아, 이 말만 들어도 무슨 상황인지 알만하다.
역시나 변성기인 우리 집 중1 아들 목소리랑 거의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아이의 절규는 처절했지만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귀를 쫑긋 세우고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집 엄마의 반응을 기다렸는데, 이 집 엄마 참 너무하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근조근 아이를 나무라고 있는 듯했다. 볼륨 좀 키워주시지, 인간미 없게...
한참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더니 다시 아이의 절규는 이어졌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충돌, 사춘기 아이들을 키우는 집에서 흔히 벌어지는 상황이긴 한데 이 집 상황은 조금 신선해 보였다. 엄마에게 바락바락 대드는 모양새임에도 아이는 그 와중에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지키고 있었다. 존댓말 때문인 것도 있지만, 아이의 워딩이 신선했다. 우리 집을 떠올려보자면 게임 시간을 지키지 않아서, 혹은 유튜브를 많이 봐서, 방을 난장판으로 해둬서, 주로 이런 일로 나는 격분하고 아이는 능구렁이처럼 그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집은 엄마는 고요하고, 아이가 울분을 터트린다. 엄마의 고요함, 아이의 절규가 아주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나도 어떤 상황에서든 소리치지 않는 교양과 침착함을 배워야겠다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우리 집 중1은 화요일부터 수학, 영어 학원 방학 특강에 들어갔다. 이놈의 대형 학원들은 3주간의 짧은 여름방학에도 방학 특강이란 걸 강제로 수강하게 하여 방학 특수를 누린다. 특강이 선택인 줄 알았다가 의무라는 얘기를 듣고 한 번 놀랐고, 청구된 수강료에 다시 한번 놀랐고, 늘어난 수업 시간에 이게 맞는 건가 싶었다. 어제 아이는 2시 반에 집에서 나가 밤 10시 반에 귀가했다. 중간에 저녁 시간과 왕복 셔틀 시간을 빼고 수업시간만 6시간이었다. 아이에게 아예 방학 3주간 학원 모두 쉬고 엄마랑 집에서 공부하며 여행이나 다닐까?라고 진심과 사심으로 권유했는데 아이는 단칼에 거절했다.
주말 동안 서울 자취방에 다녀온 큰 아이가 제 동생이 온종일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밤늦게 집에 들어온 걸 보더니 마치 자기가 아빠인 것처럼 열을 냈다. "학원들 미친 거 아니야? 겨우 중1인데 무슨 고등학생들처럼 돌려?" 이사오기 전 비학군지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큰 아이에게 이사 온 동네의 학구열이 비정상적으로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자기 중1때와 동생의 모습을 비교해 보니 달라도 너무 다른 모양 새니까. 큰 아이는 선행이라고 해봐야 한 학기 선행이 고작이었는데 동생은 몇 년치 선행을 하고 있다. 뭐가 맞는 건지 나도 잘은 모르겠다. 그냥 이 동네로 이사 오면서 아이 친구들이 주로 다니는 곳에 보내다 보니 아이는 이제 이런 흐름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하고 별 불만이 없어 보인다. 이래서 면학분위기가 중요한 건가 싶기도 하다.
큰 아이에게 "너는 학창 시절에 엄마의 기대가 부담스러워 버거웠거나 한 적이 있니?"라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아이가 하는 말, "엄마는 나한테 큰 기대가 없었잖아? 부담스러웠던 적 한 번도 없는데?"라고 했다. 정말이지 그랬다. 고1 되던 해 겨울 방학 동안 아이에게 영어 과외 선생님을 붙여준 적이 있다. 그 선생님은 J대 출신이었다. 너무 반듯하고 참한 청년이었고 나는 그때 아이에게 말했었다. "너도 공부해서 J대 정도만 가주면 좋겠다" 그 당시 그 동네에서는 인서울만 해도 성공이라는 주변 사람들 반응에 더 큰 바람을 가질 수도 없었다. 예상밖의 성취가 원동력이 되어주었고 우리의 기대를 넘어선 입시 결과를 얻었다.
큰 아이가 이렇게 되자 작은 아이에 대한 기대가 상향조정되는 것이 문제였다.
'제 형만큼은 해야지'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정신 차려!'를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다.
어제 점심 식사 후, 처음으로 수학 특강에 가면서 조금 부담스러운 듯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이따 밤에 만나" 하고 가더니 한밤중에 돌아온 아이의 얼굴은 오히려 맑았다. 힘들지 않았냐고 물으니 "응, 할만해"라고 해서 마음이 놓였다. 분리수거장에서 들은 소란을 얘기했더니 아이가 흥미롭게 들었다. 그러더니 하는 말.
"그러게 그 엄마는 왜 애를 부담스럽게 해? 그냥 내비두면 알아서 할 걸"
과연 알아서 할라나? 의문이 들었지만 아이의 해맑은 표정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이의 입에서 엄마의 기대가 버거워서 너무 힘들다는 절규를 듣지 않도록 나의 욕망을 잘 조절해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