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에코백, 그게 뭐라고...
어려서는 자면서 꿈을 정말 많이 꿨다. 나이가 들수록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아침에 일어났을 때 또렷하게 기억나는 꿈을 꿔본 기억이 드물다. 간 밤의 꿈은 너무나 생생해서 잠에서 깼을 때 깊은 안도를 느꼈다.
간 밤의 꿈에서 내내 나는 낭패감을 느꼈다. 꿈속에서 내가 당근마켓에서 가방을 하나 샀다. 꿈 답게도 너무 얼토당토않은 내용이었지만 좀 웃기기도 해서 기록해 본다. 내가 산 가방은 관심도 없고 구경도 못해 본 에르메스 에코백이었다. 내가 판매자에게 건네어야 할 돈은 100만 원이었는데, 왠지 가방을 먼저 받았고 돈을 미처 건네지 못한 상태였다. 이 가방을 먼저 받아서 집에 보관해 두고 누구한테도 이걸 샀다는 얘길 할 수도 없고 사용할 수도 없어서 마음이 초조한 상태였다. 돈을 보내줘야 하는데 당장은 돈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판매자는 나에게 계속 전화를 해왔고, 나는 떼먹을 생각은 없었지만 돈도 보내 줄 수 없었고, 그 전화를 받을 수도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판매자는 나를 경찰에 고소하겠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천 원도 남한테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데 어쩌다 내가 이런 짓을 했을까 후회 막급이었다. 뒤늦게 가방을 돌려주고 사과를 하고 싶었다. 전화를 받을 수도 없고 할 수도 없으니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한마디로 수습 불가였다.
미치고 환장하겠다. 에르메스 에코백이 뭐 대단했냐면, 그냥 흰색 캔버스 에코백이었다. 이게 뭐라고 덜컥 그 가방을 받아 왔을까? 후회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없었던 일로 하고 싶다.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꿈인 걸 깨달았다. 그리고 안도하며 눈을 떴다.
잠들기 전에 EBS에서 다큐 한편을 봤다. 대학생들의 취업에 관련된 다큐였고, 내용 중에 당근마켓에 취업한 젊은이의 이야기가 있어서 당근마켓 본사 근무 분위기가 저렇구나 하며 봤었다. 그 장면 때문에 이런 꿈을 꾼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돈 때문에 가슴이 오그라드는 이런 꿈을 꾼 이유는 전날 갑작스럽게 제주 여행을 계획하고 순식간에 항공, 렌트, 숙소 비용을 덜컥 결제해 놓아서였을 것이다. 여름휴가 계획이 전혀 없었다. 날이 더우니 집에나 있어야지 했는데 작은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명색이 방학인데. 그래서 꽉 찬 2박 3일 일정으로 제주도나 다녀오자며 순식간에 예약을 끝내고 결제를 마쳐놨는데, 그게 은근 마음에 부담이 되었나 보다. '카드 결제일이 다가오면 어쩌지?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든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일단 저질러놨다. 나도 대학원 생활 시작하면 당분간 여행 갈 여유가 없을 듯 하니 시작 전에 바람이나 쐬고 오자며 합리화했었다.
눈을 떠서 에르메스에 에코백이 있긴 한가 싶어 검색해 보니 있더라. 그냥 에코백인데 자그마치 200만 원이 넘었다. 당근에서 100만 원인 게 합당한 가격이다. 나는 이 나이 되도록 명품백 하나가 없는 사람이다. 가방 하나에 몇 백씩 주고 살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고, 그런 걸 왜 들고 다녀야만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평소에 에코백을 주로 들고 다닌다. 격식 있는 자리엔 적당한 가격의 품질 좋은 천연가죽 백을 든다. 내가 이러니 가족들은 내가 명품백 혐오자라고 믿는 모양이다. 명품백을 선물하면 나한테 크게 혼이 날 것 같은지 절대 선물로도 사다 주지 않는다. 엄마의 취향을 알고 있는 아들도 유럽 여행 갔다가 파리의 유명한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에코백을 사 와서 선물했다. 꿈속에 에르메스가 나온 걸 보니, 나도 모르는 내 무의식은 명품을 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사다 주면 혼내지 않고 잘 쓸 테니 겁먹지 말길...ㅋㅋㅋ
사람은 자면서 평균 대여섯 개의 꿈을 꾼다고 한다. '기억장벽'이라고 하는 꿈에 대한 저항 때문에 기억을 잘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기억장벽이 생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자신이 꿈속에서조차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고, 무의식이 말해주는 것을 들을 준비가 부족할 수도 있고, 꿈의 내용을 용납하기 싫어 부정하는 마음 때문일 수도 있고, 꿈까지 해석하고 신경 쓰는 것이 버겁다 느껴져서일 수도 있고, 꿈을 기억해야 한다는 지나친 압박감이 오히려 기억을 막기도 하며, 꿈의 가치를 하찮게 여겨 무시하면 꿈은 기억나지 않는다. 꿈은 '무의식의 꽃'이라고 하는데, 결국 꿈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인 셈이다. 나의 경우는 나이가 들면서 꿈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과 꿈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는 마음이 점점 커졌던 것 같다. 두렵고 불쾌한 꿈을 꿨을 때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무시하는 방향으로 일관했다. 그러니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통한 정신분석 기법이 와닿을 턱이 없다. 무의식보다는 의식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카톡알람이 떠서 열어보니 엊그제 신청해 둔 소비쿠폰이 도착해 있었다. 남편도 작은 아이 몫까지 합해 생활비 카드에 받아뒀다며 실컷 쓰라며 문자를 보내놨다. 이런 일이 있으려고 밤새 그렇게 돈에 시달렸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