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더하기
수원은 나에게 제2의 고향과도 같은 도시이다. 20년을 살았으니 고향보다 더 오래 산 도시인 셈이다. 그 도시에서 일하고 아이들을 낳고 아이들을 키우며 우리 부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냈다고 볼 수 있다. 이사 오고도 한동안은 이런저런 이유로 그 동네를 자주 방문하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뜸했다. 몇 달 만에 옛 동네를 찾았다.
수원에 사는 동안 많이 의지했던 동네 언니가 어제 오랜만에 연락을 해왔다. 언니가 일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면서 얼굴 보기가 힘들었는데 귀한 여름휴가 중 하루를 나에게 쓰고자 했다. 언니가 우리 동네로 오겠다는 걸 기어코 내가 그쪽으로 가겠다고 고집 피웠다. 그 동네가 그립기도 했고, 현재 정체성 불백(불러줘야 나가는 백수)인 나는 집을 나가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이 도시를 떠나야만 했다. 또 다른 언니와 셋이 만났다. 큰 아이 친구 엄마들인데, 큰 아이를 비교적 일찍 낳은 편이라 큰 아이 친구 엄마들 사이에서는 내가 거의 막내다. 작은 아이 친구 엄마들 사이에서는 내가 왕언니다. 둘 다 경험해 보니 나는 막내 편에 속하는 걸 더 편안해하는 사람이더라. 나는 리더십이 부족한 사람인가? 언니 노릇이 쉽지 않다.
언니들에게는 일상의 장소들이겠지만 내겐 추억의 식당이고 추억의 카페가 돼 버린 곳들을 방문했다. 오랜만에 만나니 새로운 소식이 많았다. 언니들이 둘 다 내년에 사위를 보고 며느리를 본다고 해서 나는 눈이 커지고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우리 아이들보다 네 살 위인 형과 누나가 벌써 결혼을? 사 년 후 내게도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갑자기 현타가 강하게 오는 것이었다. 이 언니들이 장모가 되고 시어머니가 되고, 어쩌면 또 할머니가 될 수도 있다.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되면서 인생의 새로운 장이 시작되겠구나, 그게 아주 먼 훗날의 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성큼 앞에 와 있어서 너무 놀랐다.
새로 맞이할 가족 이야기, 큰 애 친구들의 취업소식, 평점 4.5를 얻어낸 기특한 아들 소식, 옛 동네에는 좋은 소식도 가득이었고, 지난주 시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도 있었다. 평점 4.5를 자랑한 언니가 밥을 샀고, 커피는 장례식에 가지 못한 내가 샀다. 그 흐름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집에 돌아와 이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 누나랑 △ 형이랑 내년에 결혼한대!!!"
너무 놀라서 순간 말문을 잃어버린 남편과 큰 아이 반응을 보고 아차 싶었다.
아니 아니, 걔네 둘이 결혼하는 게 아니라 각자 결혼한다고!
그럼 그렇지. 둘이 결혼하면 그건 진짜 사고지.
말 전달 잘해야 한다. 나는 틀린 말을 한 게 아니지만 틀리게 전달되었다.
말이라는 게 그렇게 되기가 아주 쉽다. 내가 한 말은 즉각 전달과정의 오류가 발견되어 정정하기라도 쉽지, 미처 정정할 새도 없이 잘못 전달된 말들이 얼마나 많을까?
남편이 그랬다.
"다음 모임에는 그 언니들 기저귀 가방 들고 손주들 데리고 나오는 거 아냐?"
아................ 진짜 그런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
다시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가는 건가? 그건 너무 싫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