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일으켜 세우는 자 누구인가?

You raise me up, LG Twins

by 낮별

엊그제 만난 언니의 딸과 예비사위가 야구팬이라고 했다. 둘이 야구장에서 치맥 데이트로 사랑을 키워나갔다고 한다. 우리 부부도 그랬다. 야구 시즌에는 야구장에서, 야구 시즌이 끝나면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남편을 만나기 전에는 야구를 전혀 몰랐다. 어려서 경험해 본 발야구 수준의 지식만 있었는데 야구팬인 썸남(현 남편)을 따라 야구장에 처음 갔을 때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하필이면 치어리더가 바로 보이는 응원석에 앉아있었고 미친 야구팬들과 썸남이 일어나 소리치고 손뼉 치면 나는 반박자 늦게 일어나고 손뼉 쳤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는 순간마다 내가 귓속말로 물어보면 썸남이 귓속말로 상황을 설명해 줬다. 그는 인내심이 훌륭한 선생이었다. 바보 같은 질문을 해도 웃으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왜 어떤 홈런은 1점이고 어떤 홈런은 4점인지 그에 버금가는 질문들을 쏟아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야구팬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썸남과의 감정이 점점 커지면서 야구 지식이 늘어났다. 아니, 야구 지식이 늘어나면서 썸남과의 감정이 커졌을지도 모른다. 내가 계속 야구 바보였다면 우리는 관계를 이어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남편은 그런 면에서 영리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를 나에게 잘 전수시켜 놓았고, 야구라는 스포츠는 우리 부부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모태 엘지팬으로 태어난 두 아들에게도 야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아이들은 야구 선수들의 이름으로 한글을 익혔다. 두 녀석 모두 한때 장래희망 야구선수를 열정적으로 꿈꿨다. 야구시즌에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엘지트윈스의 선전은 그 무엇보다 큰 기쁨이다. 누가 우리를 매일 저녁 일으켜 세워 함성을 지르게 만들 수 있을까?


KT와의 주중시리즈를 스윕 해버렸다. 어제 다른 일을 하느라 야구 중계를 잊고 있다가 3회 말이 시작될 때 티브이를 켰는데 3회 말에만 무려 6 득점을 내어 7:0이 되었다. 그 이닝만 거의 40분이 걸렸다. 나는 혼자서 3회 말만 보고 오늘 야구 볼 건 다 본 것 같다고 생각하고 티브이를 껐다. 나중에 경기 결과를 확인해 보니 18:0의 대승이었다. 하이라이트를 보고 나니 역시나 이렇게 일방적으로 대승을 거둔 경기는 그다지 재미는 없다고 생각했다. 야구는 쫓고 쫓기는 맛, 뒤집는 맛, 그런 맛이 있어야 재미있는 경기다. 케네디 대통령이 가장 재미있는 야구스코어는 8:7이라고 했다고 해서 8:7을 케네디 스코어라고 부른다. 그런데 정작 케네디 대통령은 이런 말을 한 기록이 없다고 한다. 한국에서만 쓰이는 표현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다. 케네디 스코어라는 말은 루즈벨트 스코어로 바뀌어야 하는 게 맞지만 절대 바뀌어지지 않을 것 같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다. 그걸 바꾸려면 당사자인 루즈벨트나 케네디가 나서야 하는데 그럴 일은 없으니까. 이렇게 와전된 이유를 생각해 보니 아마도 케네디 대통령이 잘 생겨서인 것 같다. 잘생긴 케네디가 그랬다면 더 파급력이 있을 테니 말이다.


경기 결과를 보고 남편도 나도 제일 먼저 내뱉은 말은 "적당히 치고 뒀다 내일 치지"였다. 오늘 칠 걸 어제 다 쳐버린 느낌이라 마음 한 편으로는 오늘은 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이다. 예감이 빗나가길...


어제의 경기 결과를 보고 야구장에서 사랑을 키웠다는 예비부부가 떠올랐다. 그들은 KT팬이다. 덥기도 짜증 나게 더운 날, 주중 시리즈의 연패와 어제의 대패가 이 예비부부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였겠구나, 경험자로서 그들이 느꼈을 실망과 분노를 너무 잘 알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18:0은 해도 해도 너무한 점수이다. 오늘은 KT가 꼭 승리하길 바란다.


몇 해 전에만 해도 야구장 표 구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요즘은 표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테이블석에서 맥주 마시며 직관하던 날들이 몹시나 그립다.

25년 결혼 생활을 돌이켜보면 함께 야구를 응원하며 생활의 무게를 덜어낸 순간이 참으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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