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독서> 유시민의 지도

내 청춘의 독서의 보잘것없음

by 낮별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유시민은 젊어서 이런 책들을 깊이 읽고 감응했기 때문에

지금의 유시민이 되었구나', 아니 그보다는 '유시민이기 때문에 그 젊은 나이에 이런 책들을 읽고 감응할 수 있었겠구나'였다. 그러니까 유시민은 다른 클래스에 있는 사람임을 확인했다. 나는 이 책에 나와있는 15권의 책 중에 제대로 읽은 것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이렇게 두 권뿐이고 청소년용 <사기>와 <자유론>을 접해봤을 뿐이다. 그것도 다 청춘과는 이미 멀어지기 시작했던 마흔이 훌쩍 넘어서였다. 유시민은 젊은 날에 읽은 이 책들을 자신의 지도에 비유했다. 자신의 지도는 옳았을까를 생각하며 나이가 들어 그 지도를 다시 꺼내봤다고 한다. 나의 청춘에는 지도가 있었던가?


내게는 유시민의 '농촌법학회'와 같은 인생학교가 없었고, 그곳에서 만난 선배들과 같은 스승이 없었다. 내 주위에는 <청춘의 독서>에 나열된 책 목록 같은 것을 읽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말이다. 지금처럼 인터넷 매체를 통해 식자들의 책 목록을 엿볼 기회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았다. 아주 어려서는 책을 본 기억조차 없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언니오빠가 먼저 읽고 방치해 둔 소설을 몰래 훔쳐 읽었다. 시드니 셀던의 소설들과 김홍신의 <인간시장>이 기억난다. 몰래 훔쳐 읽던 그 소설의 맛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학교 도서관을 방앗간 참새처럼 드나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어떻게 접하게 된 건지 도무지 그 계기를 알 수 없는 <초한지>를 읽기 위해서였다. 이런 류의 책을 빠져 읽은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항우, 유방, 장량, 한신 같은 걸출한 인물들의 이야기에 푹 빠져 <초한지>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 마음이 말랑말랑 포실포실해지면서 나는 연애소설에 입문했다. 고전이라서가 아닌 연애소설이어서 내게 간택된 <제인에어>, <폭풍의 언덕>, <오만과 편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런 책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초한지> 같은 책에는 더 이상 눈길을 두지 않았다.


십 대 이십 대에 읽은 연애소설들을 사십이 넘어서 다시 읽어본 적이 있다. 어려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읽었던 책들인데 인생을 어느 정도 살고 다시 읽으니 주인공에게 몰입하여 가슴 아프기보다는 주인공 주변에 있으면서 내가 주목하지 못했던 인물들이 보이는 것이었다. 가령 어려서는 <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열정적인 사랑의 비극적 결말이 못내 안타까워 슬펐었는데 나이가 들어 읽으니 그들의 사랑이 너무나 이기적이고 미성숙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오히려 에드거 린튼과 이사벨라 린튼 남매의 희생이 안타깝고 이 남매의 삶이 도리어 비극으로 느껴졌다.


유시민의 책을 읽으면서 나의 '청춘의 독서'를 떠올려 보고 그 간극이 너무나 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지도가 없었다. 그래서 여태껏 헤매고 다니는지도 모른다. 내가 경험한 바, 환경이 이토록 중요하구나를 깨달았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죄와 벌>을 우연히 발견하여 밤새 읽어버렸던 유시민처럼 나도 집안 어디선가 시드니 셀던이 아닌 도스토옙스키를 발견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해보았다. 아이들을 낳아 키우면서 그걸 막연히 깨달았고, 나는 책을 읽고 모으기 시작했다. 그래서 서재에는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카프카, 까뮈, 플로베르, 괴테, 지드, 마르케스, 가와바타 야스나리, 다자이 오사무, 존 쿳시 등 전 세계에서 오신 대작가들이 모여 계시다. 아이들이 우연히 그들과 만나기를, 그리하여 현실 세계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위대한 사유를 마주하게 되길 기다리면서 해묵은 먼지가 쌓이고 빛이 바래져 간다.


<청춘의 독서>에 그렇게 적혀있다. <자유론>을 쓴 존 스튜어트 밀은 학교도 다니지 않았지만 역사, 철학, 경제에 능했던 아버지와 집에서 공부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밀은) 사람이 독서와 학습을 통해 사회적 환경과 경험의 제약을 넘어 보편적 진리에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책을 통해 환경과 경험의 제약을 넘어서고 보편적 진리에 다가설 수 있다니! 이게 바로 독서의 효능이다. 보편적 진리까지 다다르지 않더라도 자신이 가진 환경과 경험의 한계를 확장하여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만 해도 충분하다 싶다.


아이들에게 이걸 알려주고 싶어 근질근질한데 '또 책 읽으라고 잔소리'라고 밖에 취급받지 못할 걸 아니까 여기다 구구절절 하소연한다. 언젠간 스스로 깨닫는 날이 오길.


책 모임에서 이 책을 읽었다. 한 달가량 되는 텀에도 불구하고 또 나만 완독하고 참석했다. 각자의 이유로 미처 완독 할 수 없었다고들 한다. 나는 '이럴 거면 책 모임 관둡시다'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끝끝내 참아냈다. 늘 이런 식이니 내가 완독에 대한 강박이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완독이 아니다. 읽으려고 했다는 것, 참석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 그러니까 쓸데없는 강박으로 마음 상해하지 말자... 나만 완독 한 걸 억울해하지 말자. 책 읽어서 남 주나? 늘 그렇게 다독이고 지나간다. 이번에도 잘 지나갔다. 다음 모임 책으로 <청춘의 독서> 목록 중 하나인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골랐다. 내가 그 책이 읽고 싶어서 장바구니에 담아 두기도 했고 무엇보다 몹시 짧다. 이토록 짧으니 모두가 읽어 오길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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