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에게 미안해서

시간의 궤적

by 낮별

어제 메일함을 열어 보니 2학기 시간표와 강의 계획서가 도착해 있었다. 6월에 등록금과 입학금을 보냈지만 별 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메일을 열어 본 순간 드디어 뭔가 시작되는구나 하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시간표를 출력해서 선수 과목이 필요한 강의와 별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 강의에 X표를 그어갔는데, 그래도 남은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첫 수강과목으로 단 세 과목을 선택해야 함이 곤혹스러웠다. 공필 전필 전선 실습의 졸업 이수학점도 생각해야 하고, 이것도 듣고 싶고 이것도 듣고 싶고 어쩌지? 그 모습을 본 큰 아이가 "엄마 진짜 새내기 같네?"라고 했다. '새내기'란 말에 마음이 파릇파릇해짐을 느꼈다.


도서관에서 대출해 온 책의 반납일이 도래하여 기필코 도서관에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도저히 낮 동안에는 도서관에 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집 근처 새로 생긴 도서관이 산 언저리에 있어서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고 해도 이 더위에 올라갔다가는 땀으로 샤워를 해야 할 각오를 해야 한다. 갈 때마다 주차장도 늘 만차라 마땅치가 않다. 미루고 미루다 남편이 퇴근하여 저녁을 먹고 나서야 함께 도서관으로 향했다. 걸어가면서 "왜 이런 곳에 시립 도서관을 지은 거야? 몸 불편하신 사람들, 어린아이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어떻게 오라고?" 투덜거렸다. 불평불만으로 투덜대며 도착한 저녁의 도서관은 아주 쾌적했다. 온도는 적당히 시원했고, 사람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도서관은 한가로워 보였다. 물론 주차장도 한가했다. 사람들이 꽉 들어차 빈자리를 찾을 수가 없을 때에는 미처 몰랐던 도서관 내부 공간의 아름다움도 느껴졌다. 새 도서관이니 책장에 꽂힌 책들은 거의가 새 책인 데다 널널한 책장 덕에 책들은 편안하게 숨 쉬고 있었다. 꽉꽉 끼어 숨 쉴 틈 없는 우리 집 책들이 가여웠다. 비움의 미학, 그게 필요한 시점이다.


책을 반납하고, 다시 책을 빌려왔다. 잠자리에 누워 백수린의 단편소설집 <여름의 빌라>를 펼쳤다. 잠들기 전에 단편소설 한 편 읽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하루의 마무리다. 한 문단이 채 끝나기 전에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이 책, 읽은 책 같은데... 아니나 달라? 블로그를 찾아보니 3년 전 여름에 이 책을 완독 했다는 기록을 남겨둔 것을 발견했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고르면서 나는 생각했었다. '백수린의 글은 처음인 것 같은데... 이 책 제목은 정말 많이 들어본 건데... 여름에 읽기 좋겠군' 어쩜 이렇게 까맣게 잊을 수 있을까? 블로그 기록에 답이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읽었던 그 무렵에 <토지>에 완전히 빠져있었다. 백수린의 책은 책모임에서 선정한 책이라 어쩔 수 없이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내 마음은 온통 <토지>에 가 있었다. 한 주 동안 <여름의 빌라>와 <토지> 두 권을 한꺼번에 완독 했다. 대가 박경리가 백수린을 집어삼킨 셈이다. 백수린에 미안했다.


작가와 책 제목은 잊었지만 문장은 기억했다. 첫 번째 단편 <시간의 궤적>을 처음 읽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읽어 나갔다. 그런데 이 작품이 너무 좋았다. 3년 전에 느끼지 못한 감정이 마구 울렁댔다. '언니'와 '나'는 파리의 어학원에서 만나서 속 깊은 우정을 나눴다. 이미 유부남이 된 전남친이 그리워 가끔씩 전화를 한다는 '언니', '나'는 그런 언니가 솔직하고 사람 냄새가 나서 좋았다. 시간이 흘러 '나'는 파리에서 만난 현지인 남자와 결혼을 했고, 타국에서의 생활과 남편과의 문화적 이질감으로 인한 위태로움을 느끼곤 했다. 여전히 전남친에게 전화를 한다는 '언니'를 이해하기 힘들어 '나'는 뾰족하게 날을 세웠다. "그건 나쁜 거 아닐까. 언니는 남의 가정을 망가뜨리고 싶어?"라고 언니에게 말했을 때의 그 눈빛. 억지로 웃으려고 하지만 끝내 물에 녹아내리는 물감처럼 한없이 희미해지던.


'언니'는 그대로였고 달라진 건 '나'였다. '나'의 상황이 달라지니 감정이 달라지고, 감정이 달라지니 관계도 달라졌다. 그토록 친밀하고 수용적이었던 관계는 이렇게 변해버렸다. "우리는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고는 한국에서든 파리에서든 다시 금방 보자고 작별의 인사를 주고받았지만 둘 중 누구도 먼저 연락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 소설을 읽고 잠이 들었고, 나는 아주 짧은 꿈을 꾸었다. 요즘 꿈에 대해 다소 너그러워졌는지 기억이 생생하다. 한때 친밀했던 관계였지만 지금은 멀어진 J가 꿈에 나타났다. 같이 공부도 하고, 같은 업계에서 일해서 자주 만났던 분이고 일을 그만두고도 잊을만하면 한 번씩 전화를 걸어주셨다. 최근 2년 정도 연락이 끊어졌다. 꿈속에서 나는 헤드셋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도서관 서고에서 책을 찾고 있었다. 출입문을 통해 J가 들어오는 걸 멀리서 보았다. 가서 반갑다고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 못 본 척 돌아섰다. 분명히 J도 나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J 역시 돌아서 다른 쪽으로 향했다. 우리는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그런 껄끄러운 사건이 전혀 없었음에도 서로를 외면했다. 각자 열람실에서 볼 일을 보고 나오려고 출입문 근처에 왔을 때 다시 J를 가까이에서 만났다. 내가 먼저 반갑게 인사했다. 그랬더니 J가 아주 어색하게 놀라는 것이었다. 마치 나를 지금에야 발견했다는 듯. 근데 그 연기가 너무 어색해서 나는 속으로 웃었다.


꿈에서 깨어나 한때 다정했으나 지금은 서로 연락조차 하지 않는 인연, 우연히 멀리서 보더라도 구태여 찾아가 인사조차 하지 않고 지나칠 옛 인연들이 얼마나 많을까를 생각했다. 시간의 궤적에 따라 인연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기도 하고, 의미가 부여되거나 의미가 축소된다.


꿈까지 꾼 마당이니 오랜만에 J에게 전화를 해봐야겠다. 올 여름휴가는 또 어느 나라로 가실 작정이신지 물어봐야겠다. 매년 여름휴가 다녀온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미국에, 영국에, 북유럽에. 나로서는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아주 머나먼 나라에 다녀온 이야기였다. 오랜만에 안부를 묻고 신나는 여행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나는 애써 외면하지 않고 구태여 찾아가서 인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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