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히 먼 훗날

'건전지 할머니'가 되고 싶다

by 낮별

며칠 전부터 남편의 오른쪽 눈꺼풀 위에 눈다래끼가 나서 안연고를 바르면서 가라앉길 기다렸는데 가라앉기는커녕 눈꺼풀에 콩알을 하나 달고 다니는 모양새가 돼버렸다. 어제 중요한 발표가 있다며 그걸 바늘로 찔러 터트리겠다고 거울 앞에 서 있길래 "그냥 병원 가서 해. 널린 게 병원인데 왜 집에서 위험하게 그러고 있어?"라고 핀잔을 줬다. 발표한 일이 잘 되지 않았다며 시무룩해서 일찌감치 퇴근해 돌아왔길래 함께 병원에 갔다. 그렇게 큰 눈다래끼가 나본 적이 없는 나는 병원에서 그걸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겠어서 대기실에 앉아 초조하게 기다렸다. 설마 칼로 찢나? 바늘로 터트리나? 상상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더니 남편이 진료실에서 나왔다. 눈꺼풀 콩알에는 별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뭘 하긴 했어? 그냥 약 먹으래?"라고 물으니 바늘로 찔러서 고름을 빼냈고 항생제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의사가 칼로 찢어서 빨리 나을래요? 바늘로 터트려서 천천히 나을래요? 하고 선택지를 줬다는데 남편은 바늘을 선택했다고. 칼로 찢으면 흉이 남을 수 있대잖아 하면서.


나는 아이 학원 보내기 전에 일찌감치 저녁을 먹었기에 나온 김에 남편 저녁을 해결하려고 식당으로 갔다. 둘이 가서 1인분을 시키는 게 마음에 걸려서 콩나물 국밥 하나와 소바 하나를 시켰다. 나는 소바 한 젓가락만 거들고 남편이 모두 해치웠다. 우리 맞은편 테이블에 노부부가 어린 손자를 데리고 나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손자는 할아버지 옆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서 할아버지가 일일이 잘라 포크로 찍어주는 돈가스를 날름날름 받아먹고 있었다. 할머니는 건너편에 앉아 혼자 고요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테이블을 흘낏 보면서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나는 나중에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어. 우리 손주들이 살면서 힘들거나 쉬고 싶을 때 '할머니 집에 가서 며칠 쉬다 오고 싶어' 하는 그런 할머니. '아, 할머니 집 가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면 그냥 마음 편하게 왔다 갈 수 있는 그런 곳이 돼주고 싶어. 그러려면 집이 아파트여서는 안 될 것 같고, 경치가 좋은 동네에 예쁜 산책로도 있어야 해. 애들이 힐링하고 가려면." 그런 말을 했다. 남편도 같은 마음인지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대화를 하고 있던 순간에도 사실 나는 마음속으로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가 계셨다면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든든했을까. 제 부모만큼이나 큰 사랑을 보여주던 할머니였는데, 내가 느끼는 상실감 못지않게 아이들의 상실감도 클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언젠가 큰 아이가 그런 말을 했었다. "내 친구들 중에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돌아가시고 아무도 없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 말을 듣고, 괜히 미안해졌다. 그리고 기필코 오래 살아서 이런 상실감이 또 들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집에 돌아와 남편과 야구를 틀어놓고, 낮에 세탁해서 거실에 널어놓은 알록달록한 인견 이불이 선풍기 바람에 펄럭이는 걸 보다가 나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여보, 나 엄마 보고 싶어." 이미 목소리에는 물기가 가득 어려있어서 남편은 깜짝 놀라 나를 돌아봤다. 뜬금없이 술도 안 마시고 무슨 청승인가 싶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보길래 나는 인견 이불을 가리켰다. "저거, 엄마가 애들 덮어주라고 사준 거잖아. 저거 보니까..." 남편도 아마 오래전 그날을 떠올렸을 것이다. 작은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친정에 갔더니 엄마집에 여름 이불이 아주 시원했다. 이게 뭔데 이렇게 시원하냐고 물으니 엄마가 인견이라고, 그렇게 좋으면 엄마가 사줄게라며 풍기에 있는 인견가게에 데리고 갔었다. 엄마는 아기용 인견 이불 한 세트와 큰 아이용 홑이불을 사주셨다. 어른이 되어서는 내가 주로 엄마에게 사 드렸지 엄마한테 뭘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그해 여름 엄마가 사주신 이불이 남았다. 선풍기 바람에 펄럭이는 이불을 자세히 보니 낡아서 몇 군데 구멍이 생겨 있었다. '낡아도 저건 못 버리겠다' 그 생각을 얼핏 했다.


엄마 없는 아이는 일찍 철이 든다더니 엄마 없는 어른은 일찍 늙나? 그런 생각이 가끔 들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급격히 늙어버린 기분이다. 몸도 여기저기 삐걱대고, 마음도 점점 쪼그라들었다. 나는 든든하고 포근한 할머니가 되고 싶은데, 그러려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 아득히 먼 훗날의 일이겠지만. 아이들이 지치고 힘들 때 언제든 와서 충전해 가는 그런 '건전지 할머니'가 되고 싶다. '건전지 할머니'라는 말이 그럴듯해서 검색해 보니 최근에 나온 그림책이 있더라~ 한발 늦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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