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첫째 날

이십여 년 만에 방문한 우도

by 낮별

가족이 다 함께 해외 자유여행을 매년 다니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진정한 다이아수저라고 한다는 카드 뉴스를 아침에 페북에서 얼핏 봤다. 그 근거로 드는 것이 그렇게 다니려면 일단 부부가 사이가 좋아야 한다. 가족 인원수만큼 어마어마한 여행 경비가 소요된다. 패키지여행이 아닌 자유여행을 다니려면 가족 구성원들 모두가 만족스러워할 만한 여행 일정이어야 한다. 모두가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최소한 인내하며 맞춰가는 좋은 인성이 요구된다. 금슬 좋은 부부, 성격 좋은 가족 구성원, 경제적 여유. 이게 다 갖춰줘야만 매년 해외 자유여행을 감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다이아수저라고 한다는 것이다. 제법 그럴듯한 주장이다. 특히나 오늘 아침에 그걸 보니 더 끄덕여지는 것이다.


지난 토요일 새벽 4시 30분에 집을 떠나 월요일 밤 12시가 넘어 집에 돌아왔다. 그러니까 아주 꽉 찬 2박 3일을 제주에서 보내고 왔다. 2박 3일은 너무 짧아서 아쉬울 것 같았는데 집에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2박 3일이면 충분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맞춰 살아온 합이 꽤 잘 맞는 듯하면서도 어딘지 삐걱거린 여행이었다. 출발도 하기 전에 확인한 일기예보는 일정 내내 비가 예보되어 있었다. 작은 아이 방학이 끝나기 전 부랴부랴 계획한 여행이지만 정작 작은 아이는 어딜 가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큰 아이는 다음 주에 있을 시험 때문에 다소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지만 자기는 제주에 가서 공부하면 된다는 당최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얘기를 하며 따라나섰다.


첫날 아침 일찍 제주 공항에 도착하니 잔뜩 흐려 있었다. 렌터카를 인수하자마자 큰 아이가 강력 추천한 '우진해장국'으로 달려갔지만 그 이른 아침부터 식당 앞에 줄 서 있는 인파를 보고 바로 차를 돌려 '은희네 해장국' 본점으로 갔다. 이곳도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대기는 없어서 바로 식사를 했다. 해장국을 든든하게 먹고 성산포여객터미널로 출발했다. 가다 보니 비가 제법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계획대로 우도에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이 여행의 주관자인 나에게 자꾸만 질문을 하는 가족들. 이런 순간에는 살짝 짜증이 밀려왔다. "가? 말어?" 첫날 우도외에는 별 다른 계획이 없었기에 일단 가보자고 했다. "들어갔다가 나오는 배 결항이면 어쩌려고?"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비는 내리다 말다를 반복했다. 아주 오래전 우도에 가 본 기억이 있었다. 그때는 차를 가지고 들어 갔었는데 오랜만에 가보니 노약자 동반이나 우도 숙박객 이외에는 렌터카를 가져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렌트한 차를 성산포에 세워두고 우도에 들어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전기바이크를 네 대 빌려서 우도를 한 바퀴 도는 것이었지만 우도에 도착했을 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땅콩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기다려봐도 비는 잦아들 기미가 없었다. 4인 가족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레이 전기차인데 4시간 렌트비용이 10만 원이나 했다. "어떻게 할 거야?" 모두가 나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최선의 정답이 없어 보이는 선택지 중 어떤 것을 결정해야 하는 것은 스트레스이다. 렌트한 차를 성산포에 세워두고 또 렌트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 비가 그칠 기미가 안 보이고 남은 레이가 몇 대 없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렌트를 했다. 4시간 동안 우도를 즐기고, 점심까지 먹어야 한다는 미션이 생기니 마음이 급해졌다.


건축에 관심이 많은 큰 아이를 위해 맨 먼저 '훈데르트 바서 파크'로 향했다. 오스트리아의 건축가이면서 화가인 훈데르트 바서. 그의 이름을 딴 전시관이 왜 우리나라에, 그것도 제주 우도에 있을까를 궁금해하며 방문했다. 성산포 선착장에서 입장 할인권을 받아 성인 8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7000원짜리 음료까지 마셨으니 입장료 부담도 없었고, 무엇보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실내 관람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4시간의 시간 제약이 없었다면 두세 시간쯤은 거뜬히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알찬 전시였다. 훈데르트 바서는 클림트와 에곤실레와 더불어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3대 화가 중 하나라고 하는데 두 거장에 비해 인지도 차이가 너무 나는 것 아닌가 했었다. 전시를 보고 나니 3대 화가라는 것 인정. 가족 모두가 만족스러워했다. 날씨가 아주 좋은 날이었다면 옥상 정원이나 분수 정원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환상적으로 아름다웠을 것이라 생각하니 비 오는 날이 살짝 아쉽기도 했지만 훈데르트 바서의 기록을 보며 오히려 좋기도 했다.


"비 오는 날 세상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흐린 날은 나에게 있어 맑은 날이며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날이다. 비 오는 날 나는 행복에 흠뻑 젖는다. 비 오는 날 나의 하루가 환하게 밝아옴을 비로소 느낄 수 있다.-1972"


"모든 빗방울은 하늘의 입맞춤이다."


훈데르트 바서의 경쾌한 그림들과 창의적인 건축물 조형을 관람하며,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런 글귀들에 마음이 위로받았다. 나는 그 어떤 예술의 형태보다 글에 잘 감동받는 사람이구나를 다시 한번 느꼈다. 그리고 적어도 이곳에서 만큼은 비가 와서 더 좋았다. 하늘의 거센 입맞춤이었다.



비가 오니 우도봉 산책은 패스하고 검멀레 해변이 내려다 보이는 지점에서 잠시 풍경을 감상했다. '검'은 '검다', '멀레'는 '모래'로 '검멀레'는 '검은 모래'를 뜻한다. 다들 우도에서는 짜장면을 먹는 분위기였다. 내가 미리 알아간 음식점도 '우도 짜장맨'이었는데 그날은 무슨 이유였는지 영업을 하고 있지 않아서 그 옆에 있는 중국집으로 갔다. 우도 짜장맨이 영업을 하지 않아서 옆집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는데 절반 이상은 중국인이었다. 우도를 돌며 느낀 건데, 우도가 마치 중국령 섬인 것처럼 느껴질 만큼 중국인이 많았다. 어쩌다 한국말이 들리면 반가울 지경이었다. 우도에서 들른 식당이나 카페에서도 중국인처럼 보이는 직원들이 있었다. 하고수동 해수욕장이 내려다 보이는 카페 '블랑 로쉐'에서 잠시 쉬었다. 이곳도 중국인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중국인이 점령한 우도, 비싼 물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은 "우도 나름 좋았다"며 자기 최면을 걸며 애를 쓰고 있었다. 비가 오는 와중에도 즐길 거 다 즐겼다며 만족스러워했다. 훈데르트 바서 파크는 날씨 좋은 날 다시 와보고 싶은 곳이라고 다음을 기약하기도 했다.


레이를 반납하고 우도를 떠나 성산포로 나왔다. 주차장을 벗어날 때 주차비 8천 원을 내라고 했다. 그 주차비를 내면서 남편은 그간 애쓴 걸 완전히 부정하며 "우도 진짜 별로네! 다신 오나 봐라"라고 말했다. 무슨 지킬과 하이드니? 아이들과 나는 동시에 빵 터졌다. 원래 작은 것에 마음이 상하는 법이다.


남원에 있는 숙소에 체크인하고 숙소 인근에 있는 흑돼지 식당 '흑돼지패밀리'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숙소까지 대리운전 서비스가 있어서 운전 걱정 없이 소맥을 즐겼다. 여행이 끝나고 남편에게 제주에서 먹은 끼니 중 어디가 가장 좋았냐고 했더니 이곳 '흑돼지패밀리'를 골랐다.



저녁 식사는 만족스러웠고, 숙소는 쾌적했고, 새벽부터 움직인 탓에 아주 단잠을 자고 일어났다. 낮에 오래간만에 커피도 한 잔 마셨는데 숙면하는 데 카페인의 방해는 일절 없었다.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면 온종일 버티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날씨는 비협조적이고, 아이들은 11년의 터울만큼이나 음악 취향이 서로 맞지 않아 내내 투닥거렸다. 작년 치앙마이에서 7일이 몹시 짧게 느껴지고 모든 시간이 좋았던 건 일단 날씨덕이 컸고, 렌터카가 없었으니 음악을 골라 듣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나? 3일 내내 조수석에서 DJ를 자처했던 큰 아이의 취향대로 음악을 들어야 했고, 작은 아이의 불만은 내내 이어졌다. 그 둘의 투닥거림을 견디는 것에 진이 빠졌다. 3분의 1이 지나갔음에 안도했다. 더 길었으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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