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둘째 날

남원 서귀포 일대

by 낮별


우리가 이번 여행에서 묵은 숙소는 남원에 있는 '명랑해녀홈스테이'라는 곳이다. 한가한 마을에 있는 독채로 투룸, 외부 테라스가 있는 데다 조식까지 서비스로 나오는 곳이라 골랐다. 이틀 동안 잔치국수와 육개장 백반을 조식으로 먹었는데 간이 아주 맞춤이었다. 식사하는 동안 서울에서 내려와 해남해녀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숙소 안에 명랑해녀님이 쓰신 책이 놓여있어서 짬짬이 절반 정도 읽었다. 대체로 기존에 살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사는 나는 이런 이야기를 지닌 사람들을 만나면 궁금해진다. 살다가 어떤 계기가 있어서 삶의 항로를 완전히 틀어버릴 수 있는 건지. 책에 의하면 잠시 쉬러 내려간 제주에서 동네 개에게 물려 좀 더 오래 머무르게 되었다고 본 것 같은데 술에 취한 상태로 읽어서 맞게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설마 개 때문이겠냐, 술이 웬수다.


8시 반으로 딱 정해놓은 조식 시간덕에 우리 집 늦잠꾸러기들 전원 기상하여 아침을 일찍 시작했다. 성산포여객터미널 기념품 가게에서 패밀리 티셔츠를 구입했었다. 흑돼지, 한라산, 한라봉, 돌고래가 그려져 있는 티셔츠였다. 우리 넷은 똑같은 티셔츠를 입고 화합을 다짐했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뭘 할까 고민하다가 숙소 근처에 자연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카페 '담소요'로 1차 목적지를 정했다. 이른 시간에 도착하니 창가 쪽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각자 공부를 했고, 남편과 나는 책을 읽다 비가 그치는 것을 보고 산책을 했다. 산책하기 너무 좋은 곳이었다. '담소요, 고요한 연못가를 거닐며 이 시공간의 아늑한 포옹 속에 내 몸과 마음을 한가로이 부려놓아 오롯한 쉼을 즐기시길 소망한다'는 글귀 그대로 충분히 좋은 시간이었다.


공부도 했겠다, 비도 그쳤겠다, 이제 좀 걸어볼까? 남원 큰엉으로 향했다. 큰엉에서 좀 걷고, 쇠소깍에 가서 카약을 타고, 외돌개도 봤다. 이 모든 것들이 예전에 몇 번씩 경험해 본 것들이라 식상할 줄 알았는데 이 모든 것이 처음이라는 작은 아이를 보며 그동안 이 아이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었구나 싶었다. 터울 많이 나는 둘째는 이런 불이익이 있다. 큰 아이 키우면서 신물 나게 해 본 것들은 일단 재켜둔다. 에버랜드 연간회원권처럼 말이다.


점심은 '해이당'이라는 해물장 요리 전문점에서 먹었다. 간장게장 킬러인 우리 집 식구들이 환장하겠지 생각했는데 음식 비주얼은 감동, 맛은 그런대로 굿. 인스타하기 적합한 곳. 밥 먹는 동안 비가 또 쏟아지는 걸 보면서 오늘 비를 참으로 잘 피해 다니고 있어서 흡족해했다. 멀리 범섬이 완벽하게 내려다 보이는 카페 '하라케케'에서 마무리하고 '쌍둥이 횟집'에서 저녁거리를 포장하여 숙소로 들어갔다. 운전 때문에 음주에서 소외되는 사람 없도록 숙소에서 저녁을 먹고자 함이었는데 포장만 받아 들었을 때 이미 너무 많은 음식에 질려버렸다. 다음에는 시장에서 회만 간단하게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받아 온 음식은 메인인 회만 먹고 나머지는 절반 이상 버려야 했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음식들 때문에 배가 불러 술도 제대로 못 마시고 피트맥주 한 병은 통으로 날렸다. 과한 것보다는 살짝 모자라는 편이 낫다. 모자라는 편이 넘쳐서 버리는 것에 대해 죄책감도 안 들고 건강에도 좋다. 왜 벌써 젓가락을 놓고 일어나냐고 더 먹으라고 잔소리할 필요도 없다. 이런 잔소리는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다 불쾌해진다. 돈은 왕창 쓰고, 과하게 먹고, 기분은 별로였다. 4인 세트라고 해서 받아왔는데 열어보니 수저세트가 여덟 벌이 들어있었다. 8인이 먹어도 좋을 양이라는 것인데 순진하게 속았다.


오전에 비가 많이 내릴 때는 카페에서 시간을 알차게 보냈고 비가 그치고 난 후에는 여기저기 잘도 돌아다닌 하루였다. 이만하면 비 오는 날 여행치고 아주 선방했다. J답게 미리 짜놓은 일정은 첫째 날과 둘째 날은 거의 그대로 수행했다. 저녁 식사 주문을 다소 과하게 하여 버린 음식이 많아서 그거 하나 아쉬웠던 것 빼고. 튀김과 돈가스, 매운탕은 거의 손도 못 댔다.


야구는 지고, 술맛은 떨어지고, 남편은 먼저 골아떨어지고, 나는 남은 음식과 술을 모조리 버리면서 씁쓸한 기분으로 둘째 날을 마감했다. 3분 2가 지나갔다. 이제 하루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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