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일 수 있어야 함께일 수 있다
쏟아지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분명 아침인데 다시 밤으로 가고 있는 듯 하늘은 캄캄했다. 거실에서 내다 보이는 테라스는 날씨 좋은 날에 앉아 있기 참 좋은 공간이었는데 한 번도 이용하지 못했다. 여덟 시 반에 맞춰 2층으로 조식을 먹으러 갔다. 우리는 안거리에 묵고 있었고 그날은 밖거리 손님들도 함께였다. 우연히도 밖거리 손님들도 우리 동네 주민들이었다. 대화를 하다 보니 스테이 사장님은 큰 아이 군대 선임이었다. 이런 우연이 겹쳐 대화의 소재가 풍부했다. 10시에 맞춰 큰 아이 수강신청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퇴실했다. 스테이 사장님 따님 추천으로 공부하기 좋은 카페라는 서귀포 '테라로사'로 향했다. 비 내리는 테라로사는 아름다웠다. 긴 창으로 귤밭이 내다 보이는 곳이었다. 오랜만에 마신 드립커피도 정말 좋았다. 이번 여행을 통해 끊었던 커피를 다시 시작했는데 여행 중에만 허락한 일탈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커피 생각이 나지 않았다.
테라로사에서 아이들은 각자 해야 할 공부를 열심히 했다. 짧은 일정의 여행지에서 과연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는데 비가 내린 덕분에 첫 일정을 카페에서 열공모드로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챙겨간 김기태의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읽었고, 남편은 <영화로 만나는 우리들의 슈퍼 스타>를 읽었다. 비는 내리고, 평소에 마시지 않던 커피를 마시며, 아이들이 열공하는 것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카페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시간이었다. 제주에 이러려고 간 것이다. 오래전부터 제주 홀릭이었던 우리 부부는 일 년에도 몇 번씩 제주로 날아갔었다. 유명한 관광지는 거의 다 방문해 봤고, 갈 때마다 새롭게 생겨나는 무슨무슨 랜드 무슨무슨 파크 이런 입장료 비싼 곳들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인스타 맛집, 인스타 카페 이런 곳들도 영 별로였다. 제주가 이런 곳들로 개발되면 될수록 제주로 향하는 발걸음이 뜸해졌다. 2년 만에 찾은 제주였다.
비 내리는 숲 길을 산책하고 싶어졌다. 서귀포 자연 휴양림으로 향했다. 고도가 조금 높아지니 비안개가 자욱하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날 숲 속 산책 진짜 환상이지, 잔뜩 기대하며 '서귀포 자연 휴양림'에 도착했다. 기상 악화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다. 어딜 갈까 고민하다가 제주에 사는 J언니에게 연락을 했다. 언니는 얼른 집으로 오라고 주소를 알려줬다. 저지리에 사는 언니 집과 남원 숙소가 너무 멀어서 이번 여행에서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기상악화로 가능해졌다. 다른 데서 노느라 바빴으면 못 볼 뻔했다. J언니 부부는 2년 전 봄에 갑자기 하던 사업을 정리하더니 제주 일년살이를 해 보겠다며 육지를 떠났다. 일년살이가 길어지고 육지 아파트를 팔아 귤밭이 딸린 제주 농가를 사서 수리와 증축을 시작하여 펜션 사업을 준비 중에 있다. 삐쩍 말랐던 언니는 살이 조금 붙었고, 살집이 제법 있었던 형부는 살이 조금 빠져서 두 사람 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개와 고양이를 키우며 이효리와 이상순처럼 살고 있었다. 큰 아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이니 벌써 25년이 넘은 인연이다. 제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육지에서 놀러 온 사람들의 연락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고 해서 연락해 볼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한껏 반겨주니 고마웠다.
반가운 만남과 즐거운 담소를 가진 후 아쉬운 마음을 가진 채 해안도로를 따라 제주로 올라가려고 나섰다. 풍력발전기가 늘어서 있고, 돌고래 동상이 보이던 부근에서 아이들은 돌고래를 찾아보겠다며 눈에 불을 켜고 서쪽 바다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러다 정말 보았다. 아주 가까운 바다에서 돌고래 떼가 움직이고 있었다. 차를 급히 세우고 돌고래 떼의 유영을 구경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물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몸통 윗부분만 슬쩍슬쩍 봤지만 분명 돌고래였을 것이다. 설마 상어나 참치는 아니겠지.
"돌고래를 보았다." 이렇게 써두고 보니 마치 "파랑새를 보았다"라고 쓴 기분이 든다. "파랑새를 보았다"는 말은 "행복을 보았다"로 읽힌다. 돌고래도 그렇게 읽힌다. 돌고래=파랑새=행복. 돌고래를 발견한 세 남자는 애어른 할 것 없이 잔뜩 흥분해서 난리법석을 떨었다. "돌고래 본 게 그렇게 좋아?" "그럼, 완전 럭키잖아" 음악 취향은 달라서 투닥대지만 돌고래 사랑은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다. 웃고 있는 그들을 보니 나도 행복했다.
셋째 날 일정은 모두 계획에서 벗어난 것들이었다. 계획에서 벗어난 덕에 J언니도 만나고 돌고래도 만났다. 여행에서는 평소에 하지 않던 일들을 하기도 하고, 평소에 하던 일들을 멈추기도 하고 그런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평소에 즐기지 않던 커피를 매일 마셨고, 첫날 둘째 날 소맥을 열심히 마셨고, 평소에 질색하는 패밀리룩을 입었다. 글쓰기를 며칠 멈췄더니 글쓰기를 잊은 사람처럼 헤맸다. 그리고 첫날 듀오링고로 스페인어 공부하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940일 넘게 이어온 스트리크를 망쳐버렸다. 여행 덕에 아이들의 음악 취향을 알게 되었다. 작은 아이는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히트 쳤던 지디의 하트브레이커에 꽂혀 있었고 대개 그런 종류의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달라고 고집 피웠다. 큰 아이는 wave to earth 같은 생소한 그룹의 졸리는 음악을 듣고 싶어 했다. 분명 내 플레이리스트를 듣고 자란 아이들인데 어쩌다 내 플리와는 이렇게도 멀어졌을까? 김포공항에 내려 우리 차를 타고 집에 오는 동안 이제야 둘은 서로의 음악 취향에 대해 타협하기 시작했다."너드 커넥션 어때?", "그건 나도 좋아", "나상현씨밴드는 어때?", "그것도 괜찮아" 진작 타협을 좀 하지 그랬냐. 여행 다 끝나고 나서 이제야... 나는 이제 너드커넥션과 나상현씨밴드 음악과 친해지려고 한다. 여행덕에 아이들의 취향을 알았다. 수십 년간 내 플리를 아무 군소리 없이 자기 플리처럼 들어준 남편에게 새삼 고맙기도 했다.
그러자고 간 여행이었지만 과하게 다녔고, 과하게 먹었다. 찍어둔 사진도 과하게 많았다. <어제의 기억>에 여행 기록을 남기고 싶어 사진첩을 열었다가 몇 번이나 포기했다. 사진을 추리는 일도, 어제의 기억을 추리는 일도 불가능해 보였다. 감정도 과잉이었다. 즐겁고 신나는 것도 과잉이었고, 짜증도 과잉이었다. 이젠 이런 과함이 점점 부담스러워지는 느낌이다. 나이가 들면서 그렇게 변하고 있다. 공항까지의 이동, 공항에서의 긴 대기시간도 버겁다. 꼼짝없이 묶여 가는 비행기 이동도 지치고, 난기류라도 만나면 느끼게 되는 공포도 너무 싫다. 그렇게 좋아하던 여행이었는데, 이렇게 변해가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 발견한 것은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 나 자신이었다. 평온한 일상으로 어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나.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듣고 싶었고, 내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싶었다. 아침에는 보이차가 마시고 싶었고, 내 베개를 베고 자고 싶었다. 무엇보다 간절했던 건 한나절만이라도 혼자의 시간이 필요했다. 일상에서는 그렇게 여행이 그립더니 여행에서는 일상이 그리워졌다.
여행덕에 일상의 행복을 또렷하게 알게 되었다. 나의 돌고래는 매일의 일상에 있었다.
매년 가족끼리 해외 자유여행을 다니는 집 아이들이 진정한 다이아수저라고 했지. 금슬 좋은 부부, 성격 좋은 가족 구성원, 여유 있는 경제력을 모두 갖췄다는 점에서. 해외도 아닌 꼴랑 2박 3일 제주 여행에서 돌아와 우리 집 아이들은 다이아수저는 애당초 글렀음을 깨달았다. 2박 3일 딱 붙어 있어 보니 알겠다. 2박 3일이면 충분했다. 모두를 집 밖으로 내 보내고 혼자 집에 남은 이 시간, 며칠간의 부대낌으로 인해 이 시간이 더없이 소중해졌다. 혼자일 수 있어야 함께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