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케미를 찾아

사랑은 무지갯빛이라

by 낮별

비포 선 라이즈와 비포 선 셋과 비포 미드나잇, 그 '비포' 시리즈를 좋아한다. 그 시리즈는 처음 봤을 때보다 반복해서 보면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장면과 대사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어서 볼수록 더 좋아진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제시와 셀린의 대화 장면을 유독 좋아하는 것 같다. 그들의 대화는 그야말로 버라이어티 하다. 얕고 깊은 이야기들이 쉴 새 없이 이어져 나온다. 걷는 순간에도, 가만히 앉아 있는 순간에도 급류에서 래프팅을 하듯 격렬한 대화와 잔잔한 호수에서 보트를 즐기는 듯한 편안한 대화가 지루할 틈 없이 계속된다. 대화의 케미가 끝내준다고 할 수 있다.


배우자와 이런 케미가 있다면 결혼 생활은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할 테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부부에게는 다소 부족한 케미이다. 이 대목에서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 '에스콰이어'가 떠오른다. "사랑은 무지갯빛이구나. 빨강은 열정, 주황은 따스함, 노랑은 기쁨, 초록은 평안, 파랑은 신뢰, 남색은 깊이, 보라는 신비로움. 아마도 아내와의 시작은 빨강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세월과 함께 다른 색이 되어가겠죠. 색이 변했다고 사랑이 아닌 건 아니었는데 저는 그걸 몰랐었죠. 빨강에서 서로의 온기와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따스한 주황이 되었고 또 점차 다른 색을 품으며 풍성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저는 그게, 사랑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거죠." 이 대사를 듣는 순간, 작가 뭔데? 왜 이렇게 심금을 울리는 건데? 싶었다. 우리 부부에게도 친밀감과 열정으로 시작하여 분명 대화의 케미가 제법 좋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각자의 취향을 존중해 주며 열띤 대화가 없이 그저 함께 있으면 편안한, 초록과 파랑 그 어디쯤에 도달했다. 소통의 단절로 보이는 것을 거부하자면 말이다. 사랑은 무지갯빛, 열정이 시들해졌다고 사랑이 아닌 건 아닌 것이다. 대화의 케미가 다소 부족해졌다고 해서 사랑이 아닌 건 아닌 것이다. 빛이 변해가고 있을 뿐.


가끔 대화의 케미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만나는 친구가 있다. 어제 그녀를 만났다.

광교 호수변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호수 산책로를 한 바퀴 도는 동안에도, 너무 더워 잠깐 땀을 식히러 들어간 카페에서도 우리의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다. 대화를 하기 위해 누구 하나 더 애쓰는 일도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요즘 내가 가지고 있는 불안과 그녀의 불안을 함께 공유했다. 아들을 키우면서 느끼는 외로움, 갱년기에 접어들며 감정 기복이 심해지는 남편들, 가족과 함께 하는 여행의 어려움, 뭐 이런 가벼운 험담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불안한 미래 같은 묵직한 이야기조차 한 마디 툭 내뱉으면 귀신같이 알아먹고 함께 공감했다.

"십 년 후에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그녀가 물었다. 그 질문에 십 년 전에 우리가 했던 이야기들을 떠올려봤다. 우리는 같은 일을 하고 있었고, 일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아이들 가르치는 이야기, 진상 학부모 험담 같은 학원을 운영하는 일에 관한 가벼운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지만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하는 묵직한 질문도 함께 나누었다. 그런 질문 끝에 우리 둘 다 학원 일을 관둔 지 오래이다. 그동안 아이들 키우느라 분주히 살아낸 것 같지만, 가슴 한편에 무겁게 얹어져 있는 질문은 십 년 전과 같다.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십 년 후에도 우리는 더해지거나 달라진 정체성을 갖고 여전히 같은 질문을 하고 있겠지.


오랜 질문 끝에 내가 가기로 한 길을 그녀는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다. 한때 심리학에 매료되어 심리학 책을 섭렵했었던 그녀는 어제 내게 심리학 책 한 보따리를 던져주며 "앞으로 공부할 거 많을 텐데 나까지 숙제 주는 것 같네"라며 웃었다. "쌤 덕에 나도 뭔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도 뭔가 찾아보려고." 그렇게 말하는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요즘 내가 느끼고 있는 불안과 걱정, 그것이 한동안 노트북을 펼쳐 글을 쓸 수 없도록 만든 것이었다. 대학원 OT, 입학식을 치르면서 나는 과연 이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에 휩싸였다. 졸업 요건을 갖추기 위해 챙겨야 하는 것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아 보인다. 괜한 짓을 벌여놓아 스스로 고난길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학업 스트레스로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지는 것은 아닐까, 학비 외에도 수련비처럼 생각지도 못한 비용이 제법 들 것 같아 가슴 한편이 답답해졌다. 그런 답답함을 호소했더니 그녀가 말했다. "왜 대학원을 가기로 결정했는지 그것만 생각하고 일단 고! 한 학기 해보고 얻는 것보다 잃는 게 크다 싶으면 때려치우면 되지" 줌으로 스터디하는 쌤도 그 얘기를 했었다. "내가 아는 쌤은 뭔가 하나 시작하면 끝을 보려고 하는 성격이라서 어떻게든 끝까지 해보려고 애쓸 것 같은데 너무 힘들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냥 한 학기라도 경험해 본다 생각하고 시작해요. 경험은 뭐든 의미가 있는 거니까."


그들의 격려로 마음이 아주 조금 진정이 되었다.

힘이 되는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 나도 그들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오랜만에 노트북을 펼쳤더니 쓰고 싶은 이야기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려고 한다.

너무 맥락 없는 이야기들이라 오늘은 이쯤에서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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