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학생의 이름은 레오였다.
"어, 수지 친구니? 안녕?"
오드리가 인사를 하자 레오는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숙였다.
"나 차 타고 집 갈 건데, 쌤 왜 왔어?"
수지가 톡 쏘았다.
'마루'의 이동지원 차량을 이용하던 수지를 오드리가 데리러 가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수지가 첫날부터 레오를 찍었다는 소문은 '마루'는 물론이고 '토닥토닥'까지 금세 퍼졌다. 선생님들은 모두 둘 사이를 응원했다. 수지와 레오는 동갑이었다. '마루'는 초중고 학생들이 섞여 있지만, 가능하면 동급생끼리 모둠을 지어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한 묶음이 되었다. 점심시간에 밥 먹을 때나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차로 이동할 때도 레오 옆자리는 당연한 듯 수지 지정석이 되었다.
수지는 까르르 웃으며 계속 장난을 치고, 레오는 수줍어하면서도 수지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둔다. 수지는 내일이 빨리 오게 하려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새벽같이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마루' 차를 기다린다. 차를 타면 창밖을 보는 척하는 레오 옆으로 가서 털썩 앉는다. 수지는 레오 얼굴만 쳐다보고 레오는 바깥만 쳐다본다. 그래도 그 시간이 얼마나 달달한지는 '마루' 선생님 얘기만 전해 듣고도 그림이 그려졌다. 오후에 집에 올 때는 수지가 먼저 내려야 한다. 수지는 레오랑 더 있고 싶어 맨 나중에 내린다고 '폭발'했다. 연속 3일을 폭발하자 수지한테 오후 차량 이용 불가 결정이 내려졌던 것이다.
'마루'에서 나와 5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수지와 오드리는 1층에 내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차가 있는 지하 2층까지 더 내려간다. 수지는 '마루'에서 나올 때부터 잡았던 레오의 손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거나 타거나 할 때도 놓는 법 없이 꼭 잡고 있다. 레오는 온순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다. 1층 문이 열리는데도 수지는 레오 옆에 붙어서 내릴 생각이 없다. 오드리가 먼저 내려서 수지를 기다린다. "수지야 내려야지. 활보선생님 기다리시잖아?" 인솔 선생님이 재촉했다. 수지는 폭발 전전단계쯤의 표정을 짓는다. "레오 손 놓기 싫어서 그래? 얼레리꼴레리" 선생님이 놀려도 수지는 꿋꿋하다. "수지야, 레오가 그렇게 좋아?" 선생님의 물음에 수지는 큰 소리로 "네!" 한다. "레오는? 레오는 어때?"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레오는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입꼬리에 걸린 웃음은 감추지 못한다. 어떤 커플이 저리 당당하고 해맑을 수 있을까.
수지가 계속 버티고 있자 선생님도 난감해한다. "그럼 우리가 레오 가는 거 보고 올라올까?" 오드리는 얼른 엘리베이터를 다시 탔다. 수지는 그것만으로 입이 찢어진다. 학생들이 하나둘 차에 타고 레오가 창가에 앉자 수지는 가까이 다가가 빤히 쳐다본다. 레오는 수줍은 미소로 바라본다. "자 출발합니다!"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탔다. '마루' 차가 주차장 커브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수지는 멍하니 보고 있다. "수지야 우리도 이제 가자." 오드리는 엘리베이터 상행 버튼을 누른다. 수지는 공기가 빠져나간 풍선처럼 시들하다. "레오가 그렇게 좋아?" 오드리의 말에 수지는 샐쭉해지며 "아니." 한다. 아까 '마루' 선생님한테는 '네'라고 했으면서.
레오는 조용하고 말이 없다. 말을 못 하는 건 아닌데 오드리는 네, 소리 말고는 들어보지 못했다. 대신 레오한테는 누구라도 무장해제시키는 순한 표정이 있었다. 눈매는 살짝 아래로 내려가고 입꼬리는 조금 올라가 있어 가만히 있어도 웃는 것처럼 보였다. 놀랄 때는 눈만 동그랗게 뜬다거나, 당황하면 입을 꾹 다물고 눈 깜박임이 많아진다거나 하는 등 레오만의 특징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수지 혼자 떠들고 레오는 듣기만 하는데도 수지는 하루 종일 레오랑 수다를 떤 것처럼 만족해했다.
"오늘 레오랑 그림 그렸어."
"오늘 레오랑 주먹밥 만들었어. "
"오늘은 레오가 안 왔어......"
수지는 매일 저녁 레오와 관련된 일상 보고를 엄마한테 했다. 학교생활도 미주알고주알 다 얘기했지만 레오 얘기만큼 톤이 높았던 적은 없었다. 병원에 가느라 레오가 결석했던 날, 수지는 떼를 쓰거나 심술도 부리지 않고 하루 종일 조용하게 지냈다고 한다. 예전과 다른 반응이다. 수지를 지켜보는 린다의 마음은 복잡하다. 수지의 변화를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엄마, 나 레오랑 결혼할까?"
수지의 물음에 린다는 미소만 짓는다.
"그럼 아기도 생기겠네?"
수지는 점점 신이 나고 린다의 눈동자는 어두워진다.
수지는 매일 편의점과 무인 문구점에 들러 레오한테 줄 선물을 산다.
처음엔 이것저것 사다가 레오가 뭘 좋아하는지 알게 된 후로 편의점에선 칸초와 딸기우유만 사고, 문구점에선 색연필, 지우개 등 그림 그릴 때 필요한 것들을 산다. 말이 서툰 수지가 말을 안 하는 레오한테서 그 정보를 어떻게 얻어냈을지 신기하다. 린다는 아침마다 레오 몫의 가방을 따로 챙겨주었다. 레오 자리에 매일 과자가 쌓여가도 다른 친구들과 나눠 먹는 건 수지가 두 눈을 뜨고 있는 한 불가능했다.
레오는 핸드폰이 없다. 수지는 왜 레오한테 폰이 없는지 속상해한다. "나도 레오랑 카톡 하고 싶은데." "나도 레오랑 전화하고 싶은데." 학교에서도 제일 부러운 것이 폰으로 소통하는 친구들의 모습이었다. 클로이는 제 기분이 내킬 때만 카톡을 해서 수지 애간장을 녹였다. 레오는 왜 폰이 없는지, 어떤 장애가 있는지, 오드리는 알 수 없었다. 걸을 때 한쪽 다리를 절기는 했지만 오드리 눈에 그 정도는 장애로도 여겨지지 않았다.
평화롭던 수지의 일상에 한 번은 라이벌이 나타났다.
레오 옆에 다른 여자아이가 앉은 것이다. 수지는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 여자아이도 보통이 아니어서 선생님이 원래 수지 자리니까 양보하라고 해도 못 들은 척이다. 수지는 두 손바닥으로 여자아이의 가슴을 확 밀쳤다. 의자에서 바닥으로 쓰러진 여자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레오는 몸을 움찔움찔할 뿐 꼼짝도 못 한다.
이 일로 린다가 불려 왔다. 린다는 여자아이한테 사과하고 선생님들한테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집으로 돌아온 린다는 수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레오를 너만 가질 수는 없어. 레오는 다른 친구랑도 친할 수 있어."
"그럼 나 레오랑 결혼 못 해?"
수지는 다급하게 묻는다.
"그건 스무 살 넘으면 생각해 보자. 나이가 20 넘어야 결혼할 수 있거든."
린다는 손가락 두 개를 보여준다.
"나 언제 20 돼?"
"음 지금 15니까 5년 더 있어야지."
"알았어."
1분과 1시간의 차이를 모르는 수지가 5년을 어떻게 이해했을지 모르겠다.
4주 간의 여름방학이 끝났다.
마지막 날은 선생님들이 송별파티를 열어주었다. 마지막 날이라 수지는 특별히 차를 타고 귀가했다. 오드리는 수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레오를 못 보니까 더 큰 난동을 부리지 않을까 오드리와 선생님 모두 조마조마했는데 수지는 얌전히 내렸다. 레오를 실은 차가 떠날 때도 수지는 가만히 있었다. 레오는 여전히 똑같은 자리에서 창밖을 보고 있다. 오드리가 손을 흔들자 레오도 살며시 손을 들었다.
"레오랑 작별인사는 잘했어? 기분이 어때? 레오도 겨울방학 때에 또 온대지?"
오드리는 조용하기만 한 수지가 불안해서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수지는 버럭 짜증을 낸다. 그리곤 쿵쿵 소리를 내며 계단을 올라간다.
수지는 개학 첫날만 학교에 나가고 다음 날부터 며칠 결석을 했다. 딱히 아픈 데는 없는데 시들시들 앓았다. 오드리는 집으로 가서 수지와 놀아주었다. 수지는 하루하루 회복 속도가 빨랐다. 소비와 식탐도 살아났다. 이제는 편의점엘 가도 레오가 좋아하던 과자를 사지 않는다. 나란히 있는 딸기우유와 초코우유 중에서 수지는 초코우유만 집는다.
가을인가 싶더니 어느새 다시 겨울방학이 되었다.
수지와 레오도 다시 만났다. 하지만 수지의 눈은 이제 다른 사람을 향해 반짝이고 있다. '마루'에 새로 등장한 고등학생 오빠다. 봄바람이 휘날리기도 전에 수지의 첫사랑은 날아가 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