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 마음이 몽글몽글 (1)

by 오드리

워킹맘인 린다에게 수지의 방학은 반가운 게 아니다. 활보가 있어도 하루 4시간 밖에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린다는 결국 중2 여름방학 때 수지를 '마루 데이케어센터'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중1 때의 호된 경험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중1 여름과 겨울은 악몽의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했다. 오전에는 린다가 오후에는 오드리가 맡아서 하면 될 줄 알았다. 활보가 없던 초등학생 때도 린다 혼자 치러낸 방학이었다. 수지는 오전에 학원 두 개를 다녀오고 남는 시간에는 엄마랑 편의점에서 보내기로 했다. 수지랑 도란도란 얘기도 하고 청소나 정리도 같이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될 줄 알았는데 린다의 계산은 첫날부터 어긋났다. 이제 수지는 엄마만 옆에 있으면 되는 얌전한 초등학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집에 두고 시간마다 한 번씩 들여다보았다. 수지는 집에서도 심심해했고 나중에는 아예 스피커폰을 켜둔 채 일을 해야 했다.

오후 시간을 맡은 오드리도 만만치 않았다. 학원은 이미 다녀왔으니까 어디 갈 데도 없이 좁은 집에서 둘이 마주 앉아 꼬박 4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무리 좋아하는 보드게임이나 인형놀이도 몇 번만 반복하면 질리고 재미가 없어진다. 수지는 계속 놀아달라고 조르는데 딱히 할 만한 게 없었다. 놀 거리를 찾아 검색까지 해보았지만 수지가 흥미를 보이는 놀이가 몇 없다는 게 문제였다. 수지는 책 읽기, 색칠 놀이, 숨은 그림 찾기 등 평범하고 일반적인 놀이는 모두 질색을 했다. 그리곤 본인도 원하는 게 뭔지 모르면서, 실체도 없는, 오로지 재미있는 놀이만을 요구했다.

퇴근 시간에 린다와 오드리가 만나면 누가 더 지쳤는지 겨루듯 서로 허탈한 웃음만 지었다. 어른들의 고충도 고충이지만 사육당하듯 집에만 있어야 하는 수지의 고통은 또 어땠으랴. 그걸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 짜증만 낼 수밖에. 린다가 이번 중2 여름방학 때는 '마루'에 보낼 거라고 했을 때 오드리는 속으로 만세 삼창을 했다. 개인 부담 비용이 크지만 여러 모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수지가 초등학생일 때는 활보도 없이 린다 혼자 데리고 다니며 일했어도 끄떡없었다.

그때는 수지가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들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고분고분했던 수지의 입에서 "싫어." "안 해." "몰라."만 쏟아져 나왔다. 이 3종 멘트가 수지의 공식 답변이 된 지 한참이 지나도록 린다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수지한테도 사춘기가 찾아왔음을. 장애가 있으면 사춘기 따위는 슬그머니 넘어가 줘야 되는 거 아닌가. 린다는 이건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자녀의 사춘기 문제로 고민하는 부모를 봐도 자기와는 상관이 없을 줄 알았다. 발달장애아의 부모로서 너무 무지했고, 당연히 수지는 예외일 거라 생각했다는 점이 미안했다. 린다와 오드리는 머리를 맞대고 매일 대책 회의를 했다.


"이유 없는 짜증이 많이 늘었어요. 전에는 이유불문 그 자리에서 폭발해 버렸다면 지금은 뭐라고 말만 붙여도 쏘아붙이는 식이죠. 왜 화가 났냐고 물으면 입을 닫아 버리고요. 뭔가 마음속의 감정을 설명하고 싶은데 표현을 못 하니까 더 답답해하는 것 같아요."

"그러게 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저한테는 그렇게까지 틱틱거리지 않았는데 요즘은 뭔 말만 하면 엄마가 뭘 알아, 하며 소리를 질러요. 그런 못된 건 어디서 배우는 건지, 너무 속상해요......."

각자 솔직하게 있는 얘기를 다 하는 것 같아도 오드리는 어쨌든 린다의 눈치를 살펴가며 말해야 했다. 수지가 오드리를 대하는 태도는 엄마한테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무례하고 불손했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린다는 이성적인 편이지만 수지 문제에서만은 냉정하지 못했다. 딸에 관한 안 좋은 얘기는 아예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오드리 혼자 속앓이를 하고 있는 와중에 통지반 선생님이나 학원 선생님들 사이에서 하나둘 수지의 사춘기와 관련한 증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수지가 선생님들한테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수지는 선생님의 권위에 순종하던 착한 학생이었다. 그런 수지가 선생님이 불러도 대답을 안 하고, 뭘 시키면 "내가 왜요?"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수지는 공식적으로 사춘기 진단을 받았다.


수지는 '나도 이제 어른이야'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집에도 혼자 가겠다 하고, 무인 문구점에도 혼자 들어갈 테니 오드리는 밖에 있으라고 했다. 수지는 무언가 한 가지에 빠지면 거기에만 집착하는 습관이 있다. 무인 문구점 옆에 인형 뽑기 집이 생기면서 수지는 한동안 정신을 못 차렸다. 처음에는 재미로 천 원씩 넣고 하다가 오천 원, 만 원 단위로 뛰더니 그것도 귀찮으니까 아예 체크카드를 넣어서 썼다. 오드리는 말리고 수지는 하겠다고 맞섰다.

"수지야 이렇게 한 번에 많이 쓰면 안 돼."

"왜 안 돼? 카드 넣으면 되잖아?"

그게 다 돈이라는 걸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뽑기는 딱 세 번만 하기로 했잖아. 약속을 지켜야지."

"싫어! 하고 싶어, 할 거야!"

최후의 수단으로 오드리는 린다한테 전화를 건다. 린다는 길게 한숨을 내쉬곤 "선생님, 그냥 수지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세요." 했다. 오드리는 머쓱해져서 뒤로 물러난다.

수지는 엄마 허락도 떨어졌겠다 신이 나서 덤벼든다. 수지는 집게발이 내려왔다가 인형을 살짝 건드리고 물러날 때마다 "아 씨, 아 씨" 하며 분통을 터뜨린다. 어쩌다가 작은 인형 하나가 텅 소리를 내며 배출구로 떨어지면 펄쩍펄쩍 뛴다. 수지는 그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돈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오드리도 더 이상 계산하지 않았다. 저것도 성취감이라 할 수 있을까. 아무 제한 없이 싫증 날 때까지 하면서 진짜 기쁨을 맛볼 수 있을까. 오드리는 의문에 휩싸인다. 수지네 집에는 크고 작은 인형들이 산처럼 쌓여간다.


식단에서도 그런 경향이 있다. 수지는 좋아하는 음식이 생기면 그것만 반복해서 먹는다. 가장 오래 유지했던 식단이 참치마요 삼각김밥에 초코우유다. 아침과 저녁으로 그것만 먹었다. 제대로 된 식사는 학교에서 먹는 급식뿐이다. 그마저도 방학 때면 못 먹는다. 심각성을 알아차린 린다는 이제 더 이상 편의점 떨이 식품을 집으로 가져가지 않는다. 그러면 수지가 직접 편의점에 쳐들어온다. 식사 외에 간식은 젤리나 과자, 아이스크림을 달고 산다. 물이나 채소, 과일 같은 건 입에 대기도 싫어한다. 오드리는 높은 산을 앞에 둔 듯 마음이 답답하다. 수지가 간식을 먹을 때마다 오드리 자신의 배가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 이 문제는 린다가 편의점을 그만두지 않는 한 해결이 쉽지 않다. 수지가 냉장고로 갈 때마다 오드리는 가슴이 철렁철렁한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무언가가 발등에 툭툭 떨어진다. 수지는 냉장고를 꽉 채워놓아야 안심한다. 하나를 먹으면 바로 하나를 사다가 메꿔야 한다. 운동은 안 하고 먹기만 하니 몸이 부실해진다. 뚜렷한 병명도 없이 시들시들 아플 때가 많다. 수지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도 그 결과가 몸으로 나타난다. 자연스럽게 결석 횟수도 늘어난다. 생리 때도 생리대 처리 문제 때문에 며칠 쉬니까 이래저래 학교를 땡땡이치는 날이 많다.

학교를 가도 재미가 없고 방학을 하면 더 재미가 없던 수지의 일상이 '마루 데이케어센터'에 나가면서부터 달라졌다.


일단 표정이 변했다. 심술 아니면 무표정, 이 두 가지가 수지의 대표 이미지였다. 무표정일 때 눈동자는 공허하고 입술 끝은 샐쭉하게 올라가 있다. 심술공주일 때는 얼굴 근육이 미간으로 모이며 일그러졌고, 울음을 터뜨리고 괴성을 지를 때는 못난이 삼 형제를 모두 합쳐놓은 것 같다. 그런 수지가 언젠가부터 웃고 있었다. 처음엔 잘못 봤나 싶어 다시 쳐다보았다. 분명 수지의 입꼬리는 실룩거리고 있었고,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를 다정하게 요리조리 굴리고 있었다. 커다란 솜사탕처럼 표정이 말랑말랑했다.


'마루'에 다니면서 물티슈나 생리대가 든 손가방 안에 작은 거울도 챙기기 시작했다. 거울이 있다고 꺼내서 보는 건 아니고 그냥 갖고만 다닌다. 거울은 클로이가 살 때 따라 산 거다. 클로이는 다이소에서 온갖 화장품을 사서 수지 얼굴에 연습을 했다. 남의 손이라면 질색하는 수지가 웬일인지 눈을 감고 얌전하게 얼굴을 맡긴다. 오드리는 화장하는 수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 수지 얼굴이 예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린다도 미인형이다. 수지는 덩치에 비해 얼굴이 작고 갸름한 데다 눈코입이 오종종하니 귀엽다. 새침한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을 땐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다. 맨 얼굴에 핑크색 립밤만 발라도 덩치와 심술궂은 표정에 가려졌던 미모가 드디어 빛을 보는 것 같다. 윤기 나는 까만 단발머리에 꽃모양 핀까지 꽂으니 공주가 따로 없다.


수지는 누가 몸에 손대는 걸 싫어한다. 사춘기 이후 더 예민해져 린다도 아침마다 곤혹스럽다. 등교 전에 머리 손질이나 옷 입는 문제로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한다. 오드리는 더더욱 손을 못 댄다. 그래서 머리핀이 덜렁거리고 머리가 헝클어지고 속옷이 삐져나와도 그냥 두어야 한다.

그런 수지가 '마루'에서 일과를 끝내고 나오는데 웬 남학생과 같이 나온다. 둘이 바짝 붙어 있는 것도 놀라운데, 수지가 그 남학생의 손을 살포시 잡고 있는 게 아닌가. /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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