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진 Jun 04. 2023

<초보 농사꾼의 하루>약속을 지킬 수 없는 농사꾼

- 귀농 첫해에 겪은 열한번째 이야기

   “일전에 유기농 퇴비 300포를 주문했었는데요, 퇴비 살포작업은 당초 예정대로 3월 10일에 하실 건가요?”

  둔내면에서 유기농 퇴비를 판매하는 사장님과 통화를 했다. 퇴비를 많이 주문하면, 직접 밭에 와서 퇴비 살포 작업까지 해주고 있었다. 살포 작업할 때 노지 밭에 가봐야 할 것 같아서, 작업 날짜를 물어본 것이다. 

  “예정은 그렇게 되어 있는데, 농사 일이라는 것이 정해진 날짜에 하기가 힘들어요. 노지 밭의 주소지와 살포 방법만 알려주면, 내가 가능할 때 가서 해놓을께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사장님의 대답이었다. 

  ‘계획대로 3월 10일날 노지 밭에 가서 살포작업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왜 농사 일이라는 것이 정해진 날짜에 하기 힘들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러려니 생각하고 다시 물어보지 않았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농사 일이라는 것이 정해진 날짜에 하기 힘든 이유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퇴비가 살포된 노지 밭에 로터리 작업을 해야만 했다. 거의 7, 8백평이나 되는 넓은 면적이었기에, 사람의 손으로 이 작업을 하는 것은 어려웠다. 트랙터를 가지고 있는 대표님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자 한참 이런 저런 계산을 하던 대표님이 3월말이나 가능하단다. 3월 초에 물어봤는데, 거의 한달 후에나 가능하다고 답을 준 것이다. 

  “감자 밭에 비료뿌리는 장비를 트랙터에 연결해 놓은 상태에요. 이 작업이 끝난 후에 로터리치는 장비로 바꿔주어야, 로터리 작업이 가능해지거든요. 그래서 빨리 해주기 힘들어요.”

  트랙터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서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큰 규모의 농사를 짓는 농부가 아닌 이상 트랙터나 기타 장비를 모두 갖추고 있지는 않다. 물론 농업기술센터의 농기계 임대사업소에서 기계 장비를 빌릴 수 있다. 이것도 2주전에는 예약을 해야 하고, 먼저 빌린 사람이 있을 경우는 우선 순위에서 밀리게 된다. 

  더군다나 각종 장비가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해도, 날씨가 받쳐주지 않으면 작업을 할 수 없다. 비가 오는 날에는 작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땅이 질척거려서 기계 장비를 다루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작업하기에 좋은 환경이 못된다. 


  3월 7일 퇴비를 판매하는 사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늘 둔내 삽교리에 갈 일이 있어서, 간 김에 퇴비 뿌려주는 작업을 할 거예요.”

  당초 예정되었던 3월 10일보다 3일이 빠른 날이었다. 빨리 해준다고 하니 감사하였다. 일찍 퇴비를 뿌려 놓으면, 완숙이 되지 않는 퇴비에서 생기는 가스 부작용을 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나치게 이른 시기에 퇴비를 뿌려 놓으면, 퇴비가 가지고 있는 질소질 비료가 기화되는 문제도 있지만.

  노지 밭에 고르게 펼쳐진 퇴비를 보면서, 올해 농사의 출발점이 만족스러웠다. 그러면서 ‘수십년 동안 회사생활을 하면서 만들어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해왔던 습관을 바꿔야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협업해야 하는 사람들의 스케줄이나 자연환경의 변화에 의해 좌우되는 농촌의 시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초보 농사꾼의 하루>집과 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