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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Aug 12. 2023

<농촌 체험하기 퇴고글>역할과 배려

- '농촌에서 살아보기'과정에 대한 열다섯번째 글

 그날은 고추모종를 심는 날이었다. 맨 앞에서 최선생님과 전장군님이 두 개의 물 분사기를 하나씩 잡고 있었다. 이 분사기의 끝이 뾰족한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모종 심기에 적당한 크기와 넓이로 멀칭 비닐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다. 동시에 분사기에 여러 개의 작은 구멍사이로 물을 흘려보내도록 되어 있었다. 

  두 사람 뒤에서는 물 분사기와 트럭의 대형 물통에 연결된 긴 호스를 교장선생님이 잡고 있었다. 최선생님과 전장군님이 물을 주기 용이하도록, 호스 길이를 조절해주는 것이다. 

  멀칭 비닐의 구멍을 물로 흠뻑 적시고 나면, 신반장과 내가 포토에서 모종 하나씩을 뽑아서 구멍에 넣어 주었다. 곧 이어서 여자 동료들은 모종이 제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흙을 살짝 덮어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가끔 트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물을 줄 때는, 길게 늘어진 호스를 교장선생님 혼자서 조절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그러면 신반장과 내가 중간에서 도와주곤 했다.

  나와 동료들은 삼천평에 달하는 공동 농장에 고추, 옥수수, 감자, 고구마, 호박 등 다양한 작물들을 정식했다. 감자는 씨감자를 심고 호박은 씨를 파종했지만, 고추, 옥수수, 고구마는 직접 기른 모종을 심었다. 교육생 동료들이 육묘 포토에 물을 주면서, 한 달이 넘게 정성스럽게 키운 모종들이다. 정식을 하는 날에는 이렇게 키운 새끼들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정식할 때 각자의 역할이 정해졌다.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정식작업은 트럭위에 실린 2천리터짜리 대형 물통에 물을 채우는 것부터 시작된다. 산채마을에서 큰 물통을 실은 농업용 트럭을 마을 개울가로 몰고 가서, 물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모종이 담긴 포토들과 모종삽들, 엉덩이 방석 등을 트럭에 싣고 밭으로 향한다.

  이 과정은 내가 맡았다. 이 트럭에는 수동 기어가 장착되어 있어서, 수동 기어를 운전해본 경험이 있는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1톤짜리 작은 트럭이지만, 주기어와 보조기어, 그리고 각종 장비를 움직여서 작업을 할 때 사용할 엔진을 갖추고 있었다. 제법 복잡한 구조여서, 대표님에게서 사용법을 따로 배워야 했다. 밭에 먼저 도착해서 모종을 심을 곳에 물을 줄 수 있도록 호스를 세팅하는 작업까지가 내 역할이었다. 

  그러면 모종 심을 곳에 물을 주는 역할은 전장군님과 최선생님이고, 두 사람의 뒤에서 길게 늘어진 호스를 정리하는 역할은 교장선생님이 담당하였다. 

  신반장과 내가 포토에 있는 모종을 빼서, 하나씩 모종 심을 구멍에 놓아주었다. 포토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모종을 빼는 동작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작업이 진행되면서 점차 포토를 든 손이 아파왔다. 허리를 굽힌 자세로 모종을 구멍에 놓아야 하기 때문에, 허리에도 통증이 왔다. 포토를 든 손을 바꿔가면서 작업하기도 하고, 가끔 허리 스트레칭을 하면서 통증을 줄여 주어야만 했다.

  여자 동료들은 구멍에 놓인 모종을 심는 작업을 진행했다. 모종에 흙을 살짝 덮어주는 정도로 심어주면 된다. 엉덩이 방석을 깔고 모종을 심는데, 고랑 간격이 좁아서 이것이 여의치 않는 곳도 있었다. 농사 일중에서 제일 힘든 것이 허리를 굽히거나 쭈그리고 앉아서 작업을 하는 과정이어서, 여자 동료들의 작업이 힘들어 보였다. 그나마 엉덩이 방석이 있어서, 조금 나아 보였지만.


  교육생들은 4월중순 감자를 시작으로 고구마, 옥수수, 고추, 단호박을 차례로 정식하였다. 그런데 처음 감자정식을 할 때 동료들간에 맡았던 역할이, 마지막으로 단호박 정식을 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끝까지 자신의 역할이 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 문득 ‘왜 그 역할만을 고집할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특히 여자 동료들은 무릎과 허리가 아플 텐데, 왜 호스를 잡거나 물을 주는 등 좀 더 편해 보이는 역할을 하고 싶어하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여자동료들이 자신의 남편들을 배려를 해주고 있었다. 교장선생님, 최선생님 모두 허리가 좋지 않은 상태였다. 이전에 허리 부위에 치료나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여자 동료들은 엉덩이 방석에 앉아 작업하면서, 서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진행하는 분위기를 즐겼다. 작업에 따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그녀들 나름의 방법이었다. 나나 신반장은 비교적 젊기(?) 때문에, 포토를 운반하고 모종을 구멍에 놓는 작업을 진행해야 했다. 이 작업 과정이 움직임도 많았고 약간의 힘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신체적인 능력의 차이가, 자연스럽게 각자의 역할을 만들어낸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배려가 공동체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일 것이다. 자연스럽게 각자의 역할이 만들어진 것이 신기하면서도,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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