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농 2년차에 경험한 열한번째 이야기
“나중에 고랑을 만들면 물빠짐이 좋아질 거예요.”
내 노지 밭의 일부분이 습해서, 비가 온 후에는 발목까지 푹푹 빠졌다. 사람은 물론 미니 포크레인까지도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였다. 내 밭의 성토작업을 했던 하총무에게 평탄화 작업이 더 필요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밭의 경사로 인해서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모이는 탓에, 낮은 부분이 습해지기 때문이다. 습한 지역에 흙을 좀 더 높이 쌓아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하총무는 나중에 고랑을 파면 자연스럽게 물길이 생겨서 괜찮아질 것이라고 했다. 나는 하총무의 말만 믿고 노지밭 만드는 작업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이것이 잘못 꿰어진 첫 단추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2024년 5월 중순 노지 밭에 홍고추 3,200주 정식을 했다. 이랑을 만들고 비닐을 멀칭한 후에 정식작업을 할 때까지 꼬박 3일이 소요되었다. ‘농촌에서 살아보기’ 후배 기수들이 와서 도와주었다. 습한 부분이 최대한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랑을 만들었다.
이랑은 농촌기술센터에서 빌려온 휴립기로 작업을 진행했다. 휴립기는 흙을 양쪽으로 퍼내서 이랑과 고랑을 만드는 기계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좋은 현석이가 휴립기의 운전을 맡았다. 그런데 습한 부분이 여전히 다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휴립기가 자꾸 빠지는 바람에 현석이가 힘으로 휴립기를 빼내기를 여러 차례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고추가 제대로 자랄 수 있을 지 걱정이 되었다. 멘토인 박선생님이 육묘해준 고추 모종들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이랑까지 만든 이상, 고추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식작업을 한 지 여러 날이 지났다. 매일 홍고추가 자라는 모습을 관찰하였는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습한 지역에 정식한 고추들이 자라지 않는 것이다. 아니 어떤 것들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땅이 너무 습하면 작물이 호흡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내 노지 밭 고추의 1/4정도가 죽고 말았다. 죽지 않고 살아있더라도 습한 지역에서 성장한 고추는 부실해서, 상품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죽어가는 고추들을 보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얼마동안 노지 밭에서의 작업은 가능하면 피하려고 했다. 하우스안의 토마토를 관리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토마토는 초기에 잘 자랐다. 하우스 제작이 늦어진 탓에 노화묘로 정식을 해서, 일부 토마토의 줄기가 제대로 자라지 않은 것들도 있지만 말이다.
토마토의 처음 출발은 좋았다. 튼실하게 자란 1화방의 방울 토마토를 6월말에 수확하였다. 친환경 인증을 받은 직후라서 가격도 나쁘지 않았다. 순조롭게 자라던 토마토가 맞이한 첫번째 장애물은 폭염이었다.
어느 날 토마토의 하엽 제거작업을 하고 있는데, 토마토의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무심코 ‘내가 너무 토마토 나무를 흔들어 대서 그런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 집 옆에 있는 하우스에서 토마토 재배를 하는 김사장님도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단다.
“햇빛이 너무 뜨거우면, 토마토의 꽃잎들이 떨어져 나가는 현상이 생겨요.”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아열대 기후로 변해가는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다. 토마토를 재배하는 많은 농가들이 똑 같은 경험을 하고 있었다. 햇빛의 강도를 낮춰주는 도포재를 비닐하우스의 바깥쪽 면에 발라주거나, 얇은 차양막을 덮어주는 것이 해법이란다.
폭염은 곧이어 폭우를 몰고왔다. 고온 다습할 때 작물들은 힘들어한다. 토마토도 예외는 아니었다. 잎곰팡이 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작년에도 잎곰팡이 병으로 수십 그루를 뽑아버린 경험이 있었기에, 자주 살충제와 함께 살균제를 뿌려줬는데도 증상이 시작된 것이다. 잎곰팡이 병이 걸린 나무의 잎들을 잘라내고, 심한 것은 뿌리채 뽑아서 산에 가져다 버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하루 밤사이에 1백미리 이상의 비가 쏟아지면서, 내 밭에 심한 폭우 피해를 입었다. 두꺼운 블록담이 무너지고 간이 화장실조차 마을 하천으로 쓰러져 버렸다. 이웃집과의 사이에 있던 자그마한 도랑이 넘쳐서, 그 물이 일부 비닐하우스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으로, 습기가 올라가면서 잎곰팡이 병이 점점 더 심해져 갔다. 결국 다른 토마토 재배 농가보다 한달 가까이 먼저 토마토 수확을 포기해야만 했다.
고추의 1/4정도가 습지에서 죽었고 토마토마저 일찍 농사를 접을 수밖에 없었을 때,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생산성과 수익성이 떨어지는 농업분야인데, 기후 변화로 인해서 농사짓기 어려운 환경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와 같은 초보 농사꾼들에게는 적응하기 힘든 환경이다.
스트레스가 몰려왔고, 농장에 가는 것이 싫은 나날이 이어졌다. 그렇게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한번 뽑아든 칼인데, 어떤 결과가 나오든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라는 오기가 들었다. ‘한번 시작한 농사인데, 적어도 3~5년은 시도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2의 삶을 사는 동안에는 굳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귀농 첫해 농사 실패로 인한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기 위해 가능한 긍정적인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일찍 내년 농사 준비에 들어갔다. 올해의 실패가 반복되지 않도록, 노지 밭의 습한 부분을 없애주고 고온 다습한 환경에 대비해서 하우스에 유동팬을 추가로 설치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준비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