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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Jan 29. 2022

<스물 두번째 이야기> 체육인의 백신접종사건과 석화파티

  첫 인상이 강렬했다. 작년 10월 20일 우리 한옥학교 대목반 38기 동료들이 처음 만나는 자리였는데도 불구하고, 낯가림 없이 활달하게 자기 소개를 했던 친구가 용섭이다. 수년동안 중국에서 해외 주재원으로 근무했단다. 주요 업무는 재무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업을 비롯해서 많은 일을 커버했다고 한다. 그것으로 인해서 회사내에서 인재로 각광받기도 했지만, 당뇨와 고지혈증, 고혈압 등 소위 말하는 성인병을 모두 달고 살게 되었단다.  

  작년에 가슴 아픈 일을 여러 번 겪었다고 한다. 아버님, 어머님이 연달아서 돌아가시고, 본인도 작년 중반에 뇌출혈로 쓰러지게 되었다. 부모님이 병치레를 하신 끝에 돌아가신 지 얼마 안되어서, 자신까지 쓰러지게 되었으니 얼마나 낙심하였을 것인가! 보통 사람 같으면, 회복하는 데 여러 해가 걸릴 것이다. 

  실제 용섭은 사지가 마비되어서, 몇 달 동안 꼼짝도 못하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의사들은 완치가 어렵다고 진단했고, 나아도 한쪽 손발부위에 장애가 올 것이라고 했단다. 하지만 용섭은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강한 의지를 지닌 친구였다. 병원에서 조금씩 움직이면서 열심히 재활을 했다. 처음에는 누워서 손발을 움직이고, 다음은 목발을 짚고 한두 발자국씩 걸어보고… 점차 재활의 속도를 높여갔다. 물론 당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음식 조절도 같이 진행하였다. 

  그렇게 반년이 넘게 재활에 매달린 끝에 정상인과 다름없이 걷고 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용섭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동네에 있던 주짓수와 특공무술을 가르치는 체육관에 등록을 하였다. 건강한 사람도 훈련이 너무 고돼서, 몇 개월 못 다니는 곳이란다. 하지만 용섭은 무술에 빠져들었고, 남들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늘었다고 한다. 

  부모님들께서 돌아가시고 자신도 뇌출혈로 쓰러졌지만 재기에 성공한 만큼, 의지도 강하고 삶에 대한 목적의식도 뚜렷한 친구였다. 첫날 자기 소개에서 그의 강인함과 적극적인 긍정성이 배어 나왔다. 첫날 회장과 총무를 뽑는 시간에도 스스로 체육부장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낯선 모임에서 허드렛일을 하기 싫어해서, 스스로 보직을 맡겠다고 나서지 않는다. 그것도 없는 보직이었던 체육부장을 달면서까지. 


  그런 용섭이가 12월초 오른쪽 발 부상을 당해서, 기브스를 한달 이상 해야만 했다. 대목반은 각종 기계장비를 활용해서 원목을 치목하고 가공하는 실습위주로 진행된다. 기브스를 한 채 실습에 참가하기 어렵다. 그래서 용섭이와 같이 기브스를 할 정도로 큰 부상을 당하면, 보통 수업을 포기하고 과정을 그만둔다. 하지만 용섭이는 목발을 짚은 채로 한달이 넘게 수업시간에 들어왔다. 직접 실습할 수는 없지만, 눈으로 보고 머리로 외우기라도 할 심산이었다. 

  이렇게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용섭이에게 시련은 부상에서 그치지 않았다. 12월 둘째 주로 기억된다. 정부에서 백신 미접종자는 한옥학교와 같은 단체 수업에 들어올 수 없게 해서, 백신을 강제 접종하게 하는 조치를 취했다. 용섭이가 우리 대목반 10명중 유일한 미접종자였다. 고혈압, 고지혈증에 당뇨까지 있고, 불과 몇 달전 뇌출혈로 쓰러졌던 용섭이는 백신의 부작용이 두려웠던 것이다. 

  보건소에서 통보를 받고 한옥학교 행정실장이, 용섭이에게 정부의 이 조치를 공유하였다. 그러자 부작용이 두려워서 백신을 맞지 않고 있던 용섭이는, 만일 백신 부작용이 생기면 누가 책임질 것이냐고 따져 물었다. 물론 행정실장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래도 용섭이는 화가 많이 났던 모양이다. 교장선생님에게 까지 큰 소리를 내면서 화를 낸 모양이다. 평소 점심식사를 2그릇씩 하던 용섭이가 밥 먹으러도 안가고, 기숙사에서 화를 삭혔다. 

  그리고는 평창 보건소뿐 아니라 질병관리청까지 전화해서, 이번 조치에 대해 따져 물었다. 그러자 질병관리청에서는 AIDS와 같은 몇몇 예외적인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 백신을 맞아야 한다고 답변했단다. 물론 백신 부작용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답변을 하지 못한 채로. 용섭이 입장에서는 갑갑한 노릇이었다. 


  그날 오후 점심식사를 하고 온 우리들은 용섭이에게 통보된 정부 조치와 함께, 한옥학교의 교장과 행정실장, 그리고 보건소와 질병관리청에 항의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우리도 용섭이 입장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반응할 수 있는 일이라고 수긍하였다. 그러면서 용섭이의 담당의사에게서 진단서를 떼어다가, 보건소에 제출해보라는 의견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용섭이는 차츰 냉정을 찾아갔다. 그리고 주말을 집에서 보내고 다시 만난 용섭이는 결국 백신을 맞기로 했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다른 방법이 없더란다. 자신은 한옥학교에서 한옥 짓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한 목표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강릉출신인 용섭이는 정선이나 인근 지역에 전원주택을 짓는 것이 꿈이기 때문이다. 그 뒤 백신을 맞기까지 거의 이틀에 한번씩 PCR 검사를 받아야 하는 불편함에도, 용섭이는 꾸준히 목발을 짚고 수업에 참석했다. (옆의 소목반에서도 비슷하게 백신 미접종자가 1명 있었는데, 정부의 강제 접종 조치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용섭이가 백신접종 문제로 화가 많이 나있던 날. 동료들이 10명밖에 안되기 때문에, 용섭이의 이야기는 수업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동료들이 싱숭생숭해서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석화 이벤트를 제안하셨다. 12월에 굴이 맛있는 시기인데다 우리 실습실에 있는 목탄난로에 석화를 구워먹으면 맛있다고 하면서. 이전 겨울 기수들이 많이 했던 이벤트란다. 

  분위기도 바꿀 겸해서, 점심시간에 나는 종철과 일연, 정수 등 몇몇이 장평 장터에 나가서 석화 한 상자를 구입해왔다. 오후 3시쯤 그날의 수업을 일찍 마무리 짓고 청소를 했다. 그리고 실습실의 목탄 난로에 석화를 넣고 굽기 시작하였다. 석화가 충분히 구워지기 까지 시간이 많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다지 기다리지 않고 석화가 구워졌다. 

  나는 구운 석화를 처음 먹어봤다. 생굴하고는 맛이 달랐다. 생굴은 강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의 신선함이 묻어나는 맛이라면, 구운 석화는 구워서 그런지 소금기가 배어 나왔다. 약간 짭짤하였지만, 여전히 굴의 신선함이 느껴졌다. 

  구워진 석화의 껍질을 까는 것이 어려웠다. 목탄난로에서 막 끄집어 낸 것이기에 뜨겁기도 했지만, 석화가 자신의 내부를 쉬이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 중에서는 선생님의 석화 껍질 까는 속도가 번개같았다. ‘석화를 참 좋아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석화를 까는 속도가 느려서 몇 개 못 먹었지만, 그래도 용섭이 사건으로 인해서 우울했던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이벤트였다. 


  석화를 구워먹으면 석화껍질의 처리가 문제다. 껍질째 그대로 버리면, 자연환경에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게차를 이용해서 바닥에 놓인 석화 껍질을 짓이겼다. 그렇게 몇 번 지게차가 왔다 갔다 하니까, 껍질이 가루로 변해있었다. 가루를 주변 산에 뿌렸는데, 이것은 식물들에게 좋은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석화 이벤트가 끝났는데도, 시간이 아직 4시밖에 안되었다. 나는 우리 실습실 바로 옆에 지어진 휴게공간인 사모정에서 시원한 공기를 들이켰다. 그러면서 하늘을 보니까, 곧 비나 눈이 쏟아질 듯이 많은 구름이 산에 걸려있었다. 벌써 조금씩 보슬비가 내리고 있어서, 수업이 끝나는 대로 인천으로 출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 마음은 벌써 인천에 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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