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농 3년차에 경험한 일곱번째 이야기
“내 토마토 모종도 길러줄 수 있어요?”
어느 날 나보다 1년 늦게 ‘농촌에서 살아보기’ 교육과정을 수료한 강선배가 요청을 해왔다. 그는 2024년에 이사해서, 올해 처음 농사짓기 시작했다. 아직 초보 티를 벗어나지 못한 나이지만, 그나마 3년정도 토마토 농사 경험이 있기에 나에게 도움받기를 원했다.
그의 집은 혼자서 농사지을 수 있는 4~5백평되는 밭이 딸려 있었다. 원래 하우스가 없는 노지밭이었다. 그가 이사오면서 50평형 정도 되는 작은 하우스 두 동을 새로 지었다. 그곳에 토마토를 재배할 계획이었다. 3~4백평 정도 되는 노지밭에는 감자, 고추 등을 심었다.
“우리도 토마토 모종을 키우려고 하니까, 강선배 것을 같이 하는 것은 어렵지 않죠. 다만, 원가만 받고 길러줄 테니까, 같이 육묘를 하시죠.”
나는 잘 아는 사람에게 육묘 장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경제적인 이익보다는 같이 농사짓는 즐거움을 나누고 싶었다. 강선배는 나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였다. 나는 백현씨와 함께 토마토 육묘틀의 크기를 좀 더 키웠다. 마침 산채마을의 김대표님도 토마토 육묘를 요청하였기에, 4천주 정도의 모종이 자랄 수 있는 크기로 만들었다.
횡성의 겨울은 너무 춥기 때문에, 밤에는 육묘틀에 전기열선이나 열풍기를 켜주고 이불을 덮어주어야 했다. 토마토 육묘틀을 만드는 작업과 함께 이불을 만들 때 강선배와 같이 일을 했다. 펜션사업을 하는 김대표님이, 손님들이 쓰던 오래된 이불들을 창고에 모아 놓았다. 우리는 그것을 수 십장 얻어 다가 케이블 타이로 이어 붙였다. (육묘할 때 쓰는 부직포 이불을 팔기는 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쌌다.)
백현씨에 이어서 강선배까지 합류하니까, 한결 수월하게 일할 수 있었다. 서로 농담도 주고받으면서 일을 하니까, 고된 줄도 몰랐다. 내가 바라던 이상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같이 한다는 것이 항상 좋은 일만 생길 수 있는가? 강선배가 없는 어느 날 백현씨가 투덜거렸다.
“강선배는 육묘를 같이 하기로 해놓고서, 몇 번 도와 주기만 하고 끝이네요. 매일 모종을 살펴보고 물을 주거나 다른 필요한 작업도 같이 해야 하는데.”
사실 육묘틀이나 이불을 만드는 작업은 하루 이틀이면 마무리할 수 있다. 정작 힘든 것은 매일 모종의 상태를 살피면서 필요한 조치를 취해주어야 하는 일이었다. 아침에 적정한 수준으로 온도가 올라가면 덮어준 이불과 비닐을 걷어주고, 지나치게 온도가 올라가지 않도록 육묘틀이 놓인 하우스의 천창(天窓)이나 측창(側窓)을 열어주어야 한다. 2~3일에 한번씩 물도 주어야 한다. 저녁이 되면 온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열풍기를 틀어주고 이불과 비닐을 다시 덮어주어야 한다. 결국 하루종일 육묘틀 옆을 지키고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아침과 저녁으로 두 번은 와서 모종을 관리해줘야 한다. 그래서 육묘를 하는 기간에는 둔내면을 벗어날 수가 없다. 농한기인 겨울인데도 여행을 가거나 다른 도시에 일정을 잡는 것을 엄두도 못냈다. 이것이 육묘를 하는 과정에서 제일 힘들었다.
“아버님이 편찮으셔서, 전주에 다녀와야 하거든요. 며칠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백현씨 혼자서 힘드니까, 강선배가 2, 3일에 한번씩 모종들을 보살펴줄 수 있나요?”
나의 아버님이 연로하신 탓에 몇 번 쓰러지셨다. 병원에 모시고 가서 쓰러진 원인을 파악해보아야 했다. 몇 년전에 디스크 수술을 하신 뒤에 그 후유증으로 인해서 제대로 걷지 못하셨다. 거기에 혈압과 고지혈증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정확한 원인 진단을 위해서는 일주일 가량 입원해서 이런 저런 검사를 받아봐야 한단다. 내가 일주일 이상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가끔씩 육묘장을 들여다 볼께요.”
강선배는 나의 부탁에 시큰둥하게 대답하였다. 그러고는 내가 없는 동안 육묘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백현씨가 혼자서 모종들을 돌볼 수밖에 없었기에, 불만이 쌓여 있었다. 그 뒤에도 똑 같은 사건이 몇차례 되풀이되었다. 육묘를 하는 동안 나와 백현씨는 이런 저런 일로 둔내면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며칠씩 가 있는 일이 생겼다. 그때마다 강선배에게 똑같이 부탁했지만, 그의 반응은 여전히 적극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런 일을 가지고 강선배와 사이가 벌어지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나와 백현씨는 그냥 아무일 없었던 듯 지나가기로 했다.
“강선배가 가지고 있는 휴립기를 빌려줄 수 있어요? 이랑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농협에서 빌리기가 어렵네요.”
모종을 다 키워서 드디어 정식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둔내면의 농부들이 비슷한 시기에 작물들을 정식하기에, 농협에서 농기계를 임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우리가 임대 예약을 했던 날짜를 전후해서 비가 여러 날 내렸다. 노지 밭도 같이 이랑을 만들어야 했기에, 땅이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결국 2주전에 농협에서 임대하기로 했던 휴립기는 사용하지도 못하였다.
“나는 다 사용했으니까, 가져가서 쓰세요.”
일찌감치 이랑만드는 작업을 마친 강선배는 흔쾌히 휴립기를 빌려주었다. 비가 그치지 않아서 정식할 때까지 필요한 모든 작업이 며칠씩 뒤로 밀렸다. 강선배의 휴립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 우리는 마음 편하게 적절한 시기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육묘 과정에서 생겼던 강선배에 대한 불만이 누그러드는 순간이었다.
나와 백현씨는 왜 강선배가 육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는 지 그 이유는 잘 모른다. 그로 인해서 강선배에 대한 불만이 생겼다. 그러던 차에 우리가 필요할 때에 그의 휴립기를 사용할 수 있으면서, 그에 대한 불만이 사그러들었다. 우리가 꼭 필요한 시기에 원하는 방식으로 협농(協農)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도움은 고마운 일이었다. 어쩌면 협농은 서로가 가능한 조건에서만 협력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