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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전연 May 15. 2024

추락의 해부

'어떻게'가 아닌 '왜'를 통한 진실 찾기

영화관에서 두 번 봤다. 처음에는 제목과 포스터만 보고 재밌는 추리 영화인 줄 알았는데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황금종려상 수상작이었다. 요즘 영화 소식에 관심 없어서 상 받은지도 몰랐다. 어쨌든 나는 예술 영화도 좋아하니까 기쁜 마음으로 영화관에 갔는데 보고 나서 정신이 좀 멍했다. 잘 만든 영화는 맞는데 스토리의 전말이 이해되지 않았고(남편이 어떻게 죽었는지 밝히지 않는 건 감독의 의도) 감독이 하고자 하는 말, 즉 주제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찝찝한 느낌.


설산을 배경으로 한 것이 좋았다. 나는 차가운 장소의 영화를 좋아한다. 파고, 샤이닝, 렛 미 인 등. 치밀하고 논리적인 내러티브를 기교 없이 덤덤한 카메라가 비추고 미장센이 리얼리즘에 덮여서 보일 듯 말 듯한 영화를, 사랑하고 추구하고 숭배하는데 이 영화, <추락의 해부>도 그런 유여서 맘에 들었다. 근자에 본 영화 중 최고였다.


영화관에 첫 번째 갔을 때와 두 번째 갔을 때 모두 관객이 많았다. 나는 많아야 10명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 훨씬 많았다. 영화 값이 비싸고 OTT가 유행하고 쇼츠와 릴스가 난무하는 세상에 이런 지루하고 무거운 영화를 본다고? 이건 지금도 이해 불가.


원래는 CGV 아트하우스에 가서 킹덤을 볼 생각이었다. 1편과 2편을 하루에 몰아서 관람하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한 것이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10시간 동안 영화관에 앉아 있는 건 미친 짓 같아서 이 <추락의 해부>를 다시 선택했다. 킹덤의 무서운 상영 시간에 놀라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선회했다기보다, 마침 이 영화를 또 보고 싶었는데 상황이 그렇게 돼서 다시 여기로 오게 되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아쉽게도 킹덤은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다. 그 다음이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영화를 두 번 보니까 첫 번째 봤을 때 들었던 의문이 거의 해소되었다. 나중에 대여섯 번까지 보면 완벽한 평론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머릿속에 80%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는 정도. 그래서 충분히 납득할 만한 글이 안 될 수도 있다. 여기에 적는 글은 촌평, 즉 관람 후기에 가까우니 이해해주기 바란다. 메모 형식으로 중요한 사항만 짤막하게 나열하겠다.


아, 이 영화를 검색해서 찾아보는 사람은 그래서 이거 재밌냐, 재미없냐 하는 게 가장 궁금할 것이다. 그에 대한 답변은 당연히 재미없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는 상업적인 추리물, 범죄물이 아니다. 칸에서 상 받은 영화니까 일반의 시선에서는 재미없을 수밖에 없다. 제목과 포스터 보고 와, 추락한 시체를 두고 치열한 두뇌 플레이를 펼치겠구나 하고 생각하면 오산.


'왜'와 '어떻게'의 대립. '왜'는 진실(진심)에 닿는 길이고 '어떻게'는 거짓 판단을 진실로 몰아가는 길이다. 만약 어떤 연예인이 마약을 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을 때 마약 검사라는 것 자체가 세상에 없어서 그걸로 진실을 판단할 수 없다면, 그 연예인이 왜 마약을 했는지 혹은 왜 할 수 없는지를 파악하면 진실을 알게 될 것이고, 진실 같은 건 상관하지 않은 채 그저 마약 했다고 몰아가고 싶다면 그 연예인이 어떻게 했는지에만 관심을 가지고 말을 만들 것이다.

'왜'는 진실을 추구하자는 것이고 '어떻게'는 일단 결론 내리고 그에 맞게 논리를 맞추자는 것이다. 전자는 영화에서 오직 다니엘뿐이고 후자는 그 외 모든 인물에 해당한다. 대머리 검사는 산드라가 남편을 죽였다 생각하고 그쪽으로 법리를 만들어간다. 소설 속 인물의 독백, 산드라가 양성애자라는 사실, 50센트의 노래(P.I.M.P.)가 여성 혐오를 담고 있다는 주장(산드라 쪽 변호사는 남편이 틀었던 노래가 가사 없는 다른 곡이라고 반박한다.). 산드라와 변호사도 남편 추락사에 대한 '왜'에는 관심 없고 무죄를 받기 위한 '어떻게'에 집중한다. 증인 중 몇몇은 사뮈엘(남편)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하나의 단서만 가지고 산드라가 범인이라는 듯한 진술을 한다. 언론은 산드라의 소설을 들추며 허구를 진실인 것처럼 방송에 내보낸다. (산드라는 그 방송을 리모컨으로 끈다.)


다니엘은 엄마(산드라)를 의심하다 '왜'를 생각하게 된다. 아빠(사뮈엘)는 왜 죽었을까? 깨달음을 얻은 수도승처럼 그는 기억 하나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을 통해 마음의 갈등과 고민을 해결하고 법정에서 '왜'를 밝힌다. 그것이 중요한 근거가 되어 산드라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


차 안에서 사뮈엘이 한 말은 자살에 대한 근거라고 하기보다 만약 자살했다면 왜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솔직한 심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니엘은 사뮈엘의 '왜'를 깨닫고 그를 이해함과 동시에 산드라가 그를 죽인 게 아님도 알게 된다. 자살까진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를 괴롭혔던 엄마에 대한 의심은 제거되었다. 다니엘은 어느 정도 진실(진심)에 닿은 것이다.


무죄 판결을 받은 산드라도 다니엘의 '왜'에 대한 진술을 통해 사뮈엘을 처음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둘은 부부 싸움을 할 때 서로의 '어떻게'만 주장했다. 마지막에 산드라가 스눕을 껴안는 장면은 '왜'를 통한 부부의 화해라고 볼 수 있다.


시의성이 강하다. 인터넷과 SNS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단편적 사실만 보고 전체를 판단한다. 아니, 짐작한다. 아니, 그걸 사실로 믿는다. 그래서 산드라는 다니엘에게 엄마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그건 일부일 뿐이라고(내 기억이 맞다면) 말한다. 모든지 진실을 알려면 '왜'에서 출발해야 한다. '어떻게'를 가지고 '왜'를 단정해선 안 된다. '어떻게'를 궁리하더라도 '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왜'에는 진실이 있지만 '어떻게'는 사실의 일부일 뿐이다.


스눕은 사뮈엘이다. 스눕의 흰 털과 검은 털, 사뮈엘의 회색 머리. 둘 다 코가 오뚝한 게 생김새가 닮았다. 뱅상은 산드라와 병맥주를 마실 때 그녀보고 바셋 하운드(견종)를 닮았다고 말한다. 너 개 닮았어. 자기는 무얼 닮았냐고 묻는다. 산드라는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당연하지. 뱅상과 사뮈엘은 둘 다 스눕을 닮았으니까. 그걸 직접 말하면 감독의 장치가 드러나버리니까. 뱅상도 회색 머리이고 개를 닮았다. 산드라의 두 남자(남편 사뮈엘이 죽고 뱅상이 변호사를 맡으면서 산드라는 뱅상과 아슬아슬한 썸을 탄다.)가 스눕으로 상징되는 것이다. 물론 스눕은 사뮈엘에 더 가깝다. 그래서 산드라가 마지막 장면에서 그를 껴안을 때 죽은 남편 사뮈엘과 화해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실제로 그 장면을 자세히 보면 산드라와 사뮈엘이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은근슬쩍 놓여 있다.


사뮈엘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을 때 그 다음 장면에서 카메라는 스눕의 뒤를 그의 눈높이에서 따라간다. 수사 현장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스눕. 마치 죽은 사뮈엘의 영혼이 집 안으로 유유히 들어가는 모습 같다. 근데 감독은 친절하게도 산드라 앞에 도착한 스눕이 오른쪽에 있는 사뮈엘의 사진으로 시선 돌리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사뮈엘 사진의 클로즈업. 이건 스눕이 사뮈엘이라는 명백한 증거다.


시력을 잃기 전 다니엘을 보살핀 사람, 사뮈엘. 시력을 잃은 후 다니엘의 안내견이 된 스눕.

하얀 눈 위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사뮈엘. 역시 하얀 눈 위에 엎드려 그의 죽음을 지켜보는 스눕. 그의 목줄은 빨간색. 우와! 반박 불가.


앞서, 차 안에서 사뮈엘이 한 말이 그의 자살을 확증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가 자살할 만큼 힘들었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 다니엘은 그 '왜'를 통해 사뮈엘의 고통을 이해한다. 그 고통이 가족 사이에 해소해야 할 진실이었다. 추락을 해부해서 산드라가 죽인 건지, 자살한 건지, 실족사한 건지 알아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애초에 알아낼 수도 없다. 영화는 '어떻게'의 방법으로는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다.) 죽었다면 왜 죽어야 했는지 알아내서 진실을 밝혀내고('왜'를 알면 '어떻게'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어떻게'에는 여전히 관심 없다. 즉, 사뮈엘이 어떻게 죽었다고 결론 내리지 않는다.) 우리는 앞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왜'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산드라가 사뮈엘의 '왜'를 알았다면 그의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다락방을 수리하는 대신 편하게 글을 썼을 테니까.


그럼 사뮈엘이 다락방에서 떨어졌다는 소리? 응. 사뮈엘이 실수로 추락했다는 얘기? 맞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첫 장면으로 유추할 수 있다. 원래 작가주의 감독은 첫 장면에 주제나 단서를 심어 놓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예술 영화를 볼 때는 첫 장면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

자, 공이 계단에서 떨어지고 스눕이 그걸 물려고 계단에서 내려온다. 떨어지고 내려오는 건 추락을 의미한다. 앞서 말했듯이 스눕은 사뮈엘이다. 사뮈엘이 추락할 것이라는 복선이다. 근데 무엇 때문에 스눕이 계단을 내려온 거지? 공. 개와 놀아줄 때 쓰는 공. 아래층에서 산드라가 학생과 인터뷰 중이었으니까 그 공은 실수로 떨어진 것이었을 테다. 그걸 던진 사람도 다니엘일 확률이 높다. 왜? 개와 산책 나간 장면에서 다니엘이 막대기를 던져 스눕과 놀아주니까. 그럼 다니엘이 실수로 스눕의 공을 떨어뜨렸다는 것이고 스눕이 그걸 주우러 계단을 내려갔다는 것. 그 공은 스눕의 물건이라 해석해도 괜찮다. 종합해 보면 스눕을 상징하는 사뮈엘이 실수로 자기 물건(공) 때문에 다락방에서 떨어졌다는 얘기가 된다. 스눕 - 공 - 계단. 사뮈엘 - 다락방을 수리에 사용된 물건 - 추락.

공이 실수로 떨어진 거니까 사뮈엘도 실족사한 것이라 해석해도 된다.


스눕이 공을 물고 계단에서 내려오는 장면 뒤에 다니엘이 그를 목욕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목욕은 정화(淨化)다. 결말에 다니엘이 사뮈엘의 '왜'(산드라를 향한 애증, 다니엘의 사고에 대한 미안함)를 이해하고 그의 죽은 영혼을 달래줄 것이라는 의미다.


페미니즘 영화다. 산드라와 사뮈엘의 부부 관계가 관습적 가부장제와 180도 반대다. 산드라가 남편 같고 사뮈엘이 아내 같다. 부부 싸움 할 때도 산드라가 먼저 신 나게 팬다.

산드라는 여자치고 머리가 짧고 사뮈엘과 뱅상은 남자치고 머리가 길다. 마르쥬(다니엘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여자)도 머리가 짧다. 반면에 검사는 머리가 아예 없다. 남자인데 굉장히 공격적인 남자 역할이라서 일부러 대머리를 섭외한 듯.

오프닝 크레딧에서 산드라와 사뮈엘 부부의 과거 사진을 보여줄 때도 산드라는 엄청 머리가 짧고 사뮈엘은 히피처럼 길다.

산드라를 인터뷰했던 학생이 증인으로 법정에 섰을 때 자신의 이름 뒤에 '양'이 아닌 '씨'를 붙여 달라고 말한다. 결혼 유무에 따라 호칭이 달라지는 게 불편하다고 지적한 건데, 왠지 그것도 프랑스에서는 페미니즘과 관련된 언어 문제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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