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서 일기

독설의 팡세

음지의 파스칼

by 심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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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부터 책을 읽었다. 그 전의 학창 시절에는 교과서와 문제집만 봤을 뿐 책다운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굳이 따지면 있긴 있겠지만 그건 만족할 만한 독서라 할 수 없다.) 문학과 철학이 재밌어서 이십 대 초반에 그런 유의 책만 읽었다. 문학은 내가 뭔가 있어 보이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철학은 내가 고민하는 삶의 문제에 답을 줄 것 같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문필가가 되는 것을 꿈꾸었고, 인생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종교에까지 손을 뻗쳤다. 처음에는 시를 깨작거렸으나 재능이 없다는 것을 통감하고 산문 연습에 전념했다. 삶에 대한 철학적 고민은, 결국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자 합리화였다. 그러니까 굳이 철학과 종교의 도움 없이 열심히 살면 되는데 열심히 하기 싫으니까 '답'을 찾겠다는 명분으로 철학과 종교를 방패막이로 삼아 게으름을 피웠던 것이다. 답을 찾으면 그때부터 인생을 열심히 살 수 있다, 답을 찾기 전까진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제대로 된 인생이 아닌 것이다, 라는 생각은 확실히 객기이자 비겁함이었다. 깨달음을 얻어 대자유를 누리겠다는 목표도 얼른 돈을 벌어 집을 사자는 목표로 바뀌었다. 이십 대 중반에 나는 진실로 영적인 깨달음을 얻고 싶었다. 그런 게 정말 인생의 종착지라 생각했다. 근데 지금은 누가 깨쳤다 해도 관심 없고 그런 책도 읽지 않고 깨달음 자체를 믿지 않는다. 깨달음이 없다는 걸 아는 게 깨달음이라고 하는데 그런 말장난 같은 것도 거부한다. 어느덧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진 현재의 나는 글 잘 쓰기와, 욕구를 절제할 정도로 열심히 살기와, 아내와 돈 많이 벌어 아이 잘 키우고 좋은 집 사기에만 관심 있다. 글쓰기 하나만 여태까지 남아 있다. 이것만큼은 먼 미래에 부끄러움이 되지 않게 열심히 할 생각이다.


『독설의 팡세』는 방황했던 그 이십 대에 읽었던 책이다. 허세 부리듯 아포리즘에 빠져 이런 짤막한 구절로 된 책을 꽤 좋아했다. 분량이 적으니까 어쨌든 책 한 권을 금방 해치웠다는 뿌듯함도 있었다. 오래전 읽었던 것을 왜 다시 꺼냈느냐 하면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읽고 미련 없이 버리기 위함이다. 그냥 버렸다가 옛 생각이 나면 또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후회를 방지하고자 점검의 목적으로 다시 읽은 것이다. 그래서 평생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발견했을 때 따로 수첩에 기록해 두었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이제 진짜 버려도 된다는 생각에 맘이 후련했다. 내 찌질했던 과거와도 이별하는 기분이었다.

크게 보면 고독, 사회, 철학, 예술에 대해서 말한다. 총 열 개의 챕터로 나뉘어 있는데 주제별로 묶으면 그렇게 네 개가 된다. 병약한 쇼펜하우어 느낌이라서 내용이 전체적으로 우울하고 냉소적이다. 인간에 대한 불신, 서양 사회에 대한 비관, 삶보다 죽음을 찬양하는 것 같은 허무주의가 꾸준히 반복된다. 이십 대 때는 이런 부정성이 평범한 인간들과는 다른 특별함과 천재성이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간지가 났는데 나이 먹은 지금 다시 보니까 그저 잘 배운 중2병처럼 느껴지고 작가가 좀 예민한 성격이었구나 하는 정도로 그친다. 문장력도 옛날에는 훌륭하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좀만 신경 쓰면 누구나 SNS에 올릴 수 있는 수준처럼 보인다. 첫 장부터 끝 장까지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거나 그의 통찰에 감탄한 적 없다. 내가 이십 대 때와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이 책의 장르를 따지면 문학과 철학의 중간 지점이라 할 수 있는데 문학성은 괜찮지만 철학적 수준은 굉장히 낮은지라 ―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가진 논리성이 부족하다는 뜻. 더 정확히 말하면 학문으로서의 철학과는 종류가 다른 철학(심오한 개똥철학)이라는 뜻 ― 전문성이 떨어져 보인다는 것도 이 책을 혹평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근데 책 끝에 있는 해제를 보니까 저자가 22살에 베르그송에 대한 논문으로 최우수 성적을 받고 심리학 학위 과정에 등록했는데 그때부터 체계적 철학과 결별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니까 학문으로서의 철학에 충분히 능력 있지만 모종의 이유로 개인(개똥) 철학에 심취했고 그걸로 작가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책이 별로 대단치 않아서 저자의 인생도 별 볼 일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연보를 보니까 공부도 잘하고 상도 많이 받고 ― 엄밀히 말하면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그가 거절했고, 38세에 『해체의 개설』이란 책으로 리바롤 상을 받은 게 그가 유일하게 수락한 것이다 ― 당시에 꽤 잘나가던 사람이었다. 그래도 나이 먹어 다시 읽은 이 책은 내게 실망이었음을 고치지 않겠다. 칸트가 이런 책을 썼다 해도 나는 대차게 깠을 것이다.


현재 내 책장은 문학, 영화, 과학으로 채워져 있다. 작품성 있는 소설, 추리와 공포를 다룬 장르 문학, 영화 이론서와 평론집, 자연과 사회에 대한 과학 서적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근거 없는 개똥철학 같은 건 퇴출되고 앞으로 유입되지 않을 것 같다. '예술'로 남보다 특별해지고 싶었고 열심히 살지 못해 삶을 '철학'하는 척했던 나의 부끄러운 과거, 이 『독설의 팡세』와 함께 안녕. 내가 이 책을 다시 찾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퇴보했다는 증거일 테니까 말이다.

인상 깊었던 구절(수첩에 따로 적어 두었던)을 몇 개 나열하고 글을 마치겠다.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잔인하든지 무관심하든지 두 가지 길이 열려 있다. 여러 징후를 보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음의 사실들이다.

남녀 모두가 두 번째 길을 택할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설명도 절교도 없을 것이며, 그들은 계속 서로 멀어질 것이다. 학파들과 사원들이 조장했던 동성애와 수음이 군중 사이에 퍼질 것이다. 사라졌던 숱한 악습들이 다시 번성할 것이다. 그리고 근육 경련의 생산성과 남녀가 받고 있는 저주를 과학기술이 대신할 것이다.


나는 서서 결심한다. 나는 눕는다. 그리고 그 결심을 취소한다.


아이스킬로스나 타키투스가 너무 소극적으로 보일 때는 『곤충들의 생활』이라는 책을 펼쳐보라. 쓸데없는 폭력, 그 지옥 속에 극작가나 역사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일 글을 깨우친 벌레 한 마리가 자신의 비극을 우리에게 이야기한다면 우리 비극에 대해서 무슨 할 말이 남겠는가?



부기

이 책의 저자 에밀 시오랑의 저서를 한 권 더 읽을 생각이다. 『독설의 팡세』만으로 그와 헤어지는 건 좀 아쉬움이 든다. 다른 책이 괜찮든 별로이든, 근데 그와 헤어지는 건 확실한 일. 왜냐하면 앞으로 읽어야 할 책이, 만나야 할 작가가 엄청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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