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필력의 귀감이 되는 신형철 평론가의 산문집이다. '슬픔' '소설' '사회' '시' '문화'라는 다섯 가지 범주로 나뉘어 있고 각각의 파트 속에 저자의 세심하고 분석적인 글들이 담겨 있다. 짧은 산문을 모아 놓은 거라 화장실에서 조금씩 읽기에 좋다.
시·소설·영화 같은 작품들과 정치·사회·역사 같은 사건들에 대한 저자의 평론이 이 책의 전부이므로 그의 평가와 논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따지는 것은 시간만 걸리고 무의미한 일일 듯하다. 예를 들어 영화 <혜화, 동>에 대한 글이 책 속에 있는데 저자의 그런 해석에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하여 그걸 꼬집어서 밝히는 게 과연 이 서평에 어울리는 일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 내재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가급적 피하고 싶다. 문학과 그 주변 일들에 대한 평가는 저자가 전문이니까 나 같은 문외한은 가만있는 게 도리라 생각한다. 최대한 외재적 입장에서 내가 이 책을 통해 받은 느낌과 얻은 생각을 말하는 게 이 글의 최선일 듯싶다.
좋았던 점과 안 좋았던 점을 밝히겠다. ('나빴던 점'이란 표현은, 이 책에 나쁜 게 없으므로 쓰지 않고 개인적 감상의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 '안 좋았던 점'이라 했다.) 좋았던 점은 우선, 훌륭한 문장과 심도 있는 글을 만난 것이었다. 한국어로 이 정도 쓰고 어떤 작품에 대해 이만큼 인식에 다다르면 어디 가서 책을 내도 욕은 안 먹을 듯싶다. 서두에 나에게 귀감이 된다고 썼는데 이 책의 높은 수준 때문에 그리 말한 것이다. 교과서 같은 모범이 있다는 건 글 쓰고 책 내고 싶은 사람에게 참 다행인 일이다. 나는 앞으로 신형철을 목표로 삼고 공부하면 되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좋았던 건 괜찮은 작품을 여럿 알게 된 것이다. 책에서 소개된 시·소설·영화 중 읽고 싶고 보고 싶은 걸 따로, 나중에 찾아볼 수 있게 정리해 두었다. 영화는 <킬링 디어>, 소설은 《슬픈 짐승》, 시는 김영승이 대표적 예다. 오래전 <송곳니>를 보고 이 감독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거장으로 성장해 있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더 랍스터>와 <킬링 디어>는 그의 대표작이다. 근자에 신작 <부고니아>가 개봉했는데 형편상 영화관 가서 보지 못하고 결말 장면만 어떻게 스포일러 당해 접했는데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 유명하고 우스꽝스러운 가설을 진짜로 구현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개인적으로 차갑고 심플한 화면을 찍는 영화감독을 좋아하는데 요르고스 란티모스도 그에 해당한다. 언젠가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은 감독이다.
《슬픈 짐승》은 "옴네 아니말 트리스테 포스트 코이툼(Omne animal triste post coitum)."이란 라틴어 관용구로 소개되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 문장의 뜻은 '모든 짐승은 교미를 끝낸 후에는 슬프다.'라는 것이다. '섹스가 끝나면, 인간은 슬프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한동안 누구와도 관계를 갖지 않은 나였기에, 그래서 그 문장에 따르면 나는 슬플 것도 없기에, 그리고 실제로 슬프지 않고 오히려 행복하기에 섹스 때문에 슬픈 인간을 한번 굽어보고 싶었다. (근데 이 소설은 개인의 사랑을 독일의 분단과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확장하는 이야기다.) 나는 왜 교미하지 않는데 행복하냐? 자식을 낳아 가족을 이뤘고 아내와 함께 집을 사겠다는 목표를 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요새 깨달은 건데 사랑은 쾌락이고 진짜 행복은 일을 열심히 하는 데 있는 것 같다. '열심히'란 쾌락을 일절 허용하지 않고 성실하게 해 나간다는 뜻이다. 그렇게 살면 사랑은 유치하게 느껴진다. 남들 열심히 공부할 때 연애해서 대학 못 간 남녀를 보는 심정이랄까. 남들 집 사겠다고 돈 모을 때 외도에 빠져 정신 못 차리는 남녀를 보는 심정이랄까. 확실히 사랑은, 지나고 나면 후회스러운 일이다.
책 속에 수록된 김영승의 시 <흐린 날 미사일>의 전문을 읽고 '와, 이 시인 도통했구나.'라고 생각했다. 신형철이 소개한 다른 시인, 김혜순과 황인찬도 좋았지만 김영승에 비할 바는 아니다. 요즘 허만하의 시집을 읽고 있는데 이 양반도 김영승한테는 안되는 것 같다. 근데 이런 내 판단이 위험한 게 아직 시 하나밖에 읽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근데 그 시 하나가 얼마나 잘 써졌으면 내가 이렇게 섣불리 판단하는 걸까. 김영승의 시집은 《흐린 날 미사일》이란 동명의 제목으로 출간돼 있다. 허만하 다 읽으면 바로 구매할 테다.
이제 안 좋았던 점을 말하겠다. 이 책을 읽고 '아쉬웠던' 점이라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단도직입적으로, 저자의 정치 성향과 에겐남스러운 감정 표출이 대하기 좀 힘들었다. 그가 문학평론가고 이 책의 출판사가 한계레니까 '진보' '좌파' 쪽임을 예상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이 어느 정치색을 가지고 있고 어디 정당을 지지하는지는 전적으로 그의 자유니까 내가 뭐라 할 수 없는데 그렇게 드러내고 글로써 전파할 것이라면 정치·사회에 대해 정확한 지식과 치밀한 논리를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물음은, 책 한 권으로 전부를 파악할 수 없지만 이 책에서 보인 저자의 (정치·사회에 관한) 생각들이 '운동권'이란 사람들의 편협한 시각과 겉멋 정의감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다소 낭만적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왼쪽 성향에 대한 궁극의 정당성은 문학가답게 인본주의가 담당한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식의 착한 말은 너무나 그럴싸해서 반대 의견을 야비하게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여기에 ENFP를 방불케 하는 감정적 발언들은, 예를 들어 국가적 재난이나 사회적 참사에 하루 종일 펜을 들 수 없었다는 둥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여 자신도 울었다는 둥은 INTJ인 나에게 굉장히 낯설고 뜨악해서 내가 나쁜 놈이거나 저자가 거짓말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사회' 파트인 『우리의 나날』이 다른 부분에 비해 실망적이었다. 생물학과 경제학으로 무장한 복거일의 책은, 신형철과 비교해보면 절대 실망적이지 않다. 나는 작가가 정치·사회에 대해 얘기하려면 법과 경제에 일정 수준 이상의 식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뻔한 인본주의로 세상을 해석하기에는 그것이 의외로 논리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기적이다.
분량이 정해진 짧은 글을 모아 놓은 산문집인데 내가 너무 단편만 보고 저자를 판단한 것 같아, 글을 마치는 이 시점에 죄송함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