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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쓸 것인가. 말 것인가.

햄릿을 읽고.


햄릿은 고뇌한다. 존재인지, 비존재인지. 사느냐 죽느냐로 한국에 잘 알려진 오역은 분명 맛깔난 부분이 있지만 (그리고 죽자살자하는 한국인 정서에도 딱 맞다) 셰익스피어가 무덤 관짝을 박차고 나와서 번역가와 편집자의 뺨싸대기를 무한 반복으로 내리쳐도 무조건 무죄다.


아버지의 유령을 만나 잔혹한 진실을 알게 된 햄릿은 맹세한다: 기필코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로. 목표를 정한 사람은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햄릿은 갈팡질팡한다. 심지어 하늘이 준 기회에도 다음에를 외치며 퇴장한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나는 햄릿에서 나를 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예술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미 만들어진 거대한 무언가의 부품이 되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인생이 아닌 그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사람. 중학교 때 결정한 진로는 교수였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니 저명한 교수가 되어 수십 년, 수백 년 후의 후학들에게 지적인 고통을 안겨주고 싶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체, 칸트, 쇼펜하우어가 나에게 그랬듯이. 마이크 타이슨이 그랬던가: 누구나 처맞기 전까지는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고. 더 이상 벼락치기가 통하지 않는 대학교에서 나의 원대한 꿈은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그렇게 진부해진 나의 인생에 무엇이 남았을까? 문득 성경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떠올랐다.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던 이 늙은 청지기는 어느 날 주인의 해고 소식을 듣고 탄식한다: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나의 버전으로 옮기자면: "실패한 교수 지망생인 나는 무엇을 할까?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자니 재능이 없고, 창작을 하자니 실패할까 두렵구나"


그렇게 삶의 목표를 잃은 나는 외쳤다: "돈이나 많이 벌자." 그렇게 열심히 9년을 일했다. 돈도 어느 정도 번 것 같다. 하지만 햄릿의 복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길을 잃었다.


Bipolar disorder, 양극성 장애가 있는 나는 널뛰기하는 감정이 익숙하다. 갑자기 의욕이 생기고 자신감이 넘칠 때엔 불현듯 몇 걸음 떼지 못한 과거의 나를 반추한다. 기분이 우울할 땐 반신욕을 하거나 푹 자고 일어났을 때의 감정을 떠올리려 안간힘을 쓴다. 불행하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런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될 때가 있다. 어떤 것이 운명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은 불현듯 찾아온다.


그 순간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던 어느 날 문득 다가왔다. 작중 주인공인 토마시와 그의 직장 상사의 대화에서. 사표를 던지며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토마시에게 직장 상사는 이렇게 묻는다: Muss es sein? (그래야만 하는가?)


그리고 토마시는 대답한다.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토마시의 말이, 밀란 쿤데라의 말이, 베토벤의 말이 내 뇌리에 메아리쳤다. 그래 그래야만 한다. 난 예술적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


예술적 인간은 어떤 걸까? 많은 정의가 있겠으나 나에게는 자신의 형상을 빚어 세상에 내놓는 사람들이다. 비록 누군가의 망치에 그 형상이 산산조각 나더라도. 빚고, 또 빚고, 결국 나의 조각이 세계의 일부가 될 때까지 ‘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예술의 형태나 방식은 중요치 않다. 그리고 난 책을 쓰기로 했다.


복수를 결심한 햄릿에게는 여러 가지 위기가 찾아온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취하고 마땅히 자신의 것인 왕위를 찬탈한 숙부 클로디어스 왕의 의심을 받는다. 그는 미친 척을 하며 위험을 회피하고자 한다. 그리고 자신의 복수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햄릿은 현명했고 나는 멍청했다. 나는 카톡 프로필 상태말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2023년 목표: 내 책 출판하기.


이제 막 꽃이 피는 3월이 되었는데 벌써부터 주위에서 글을 쓰고 있냐고 묻는다. 그들의 순수한 호의 어린 호기심은 같은 무게의 부담으로 치환되어 내 가슴에 얹힌다. 그리고 난 재능 없는 예술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지난주 월요일 독서모임에서 햄릿으로 모임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와 다음 날 독서모임에서 다룰 문지혁 작가의 <초급 한국어>를 읽었다. 이민작가의 꿈을 품고 미국에서 고군분투하는 ‘문지혁‘이 주인공인 소설이다. 이민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무언가로부터 느껴지는 동질감은 언제나 기분 좋은 울림을 준다.


2시간 만에 소설을 읽은 후 문득 견딜 수 없는 서글픔에 잠겼다. 재능 없는 예술가란 이런 거구나. 이게 어쩌면 나의 미래이구나. 문지혁 작가의 글은 반듯하고, 조리 있게 쓰여졌지만 그 이상의 울림은 없었다. 동네 노래방 곳곳에 들이찬 ‘유사 아이유’, ‘유사 성시경’, ‘유사 김동률’처럼. 어둠 속에서 한바탕 요란하게 춤을 추지만 일출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한 여름밤의 반딧불처럼.


그렇게 나는 고민한다. 쓸 것인가. 말 것인가. 써서 잔혹한 현실을 똑바로 마주하고 그 일부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늘 그래왔듯이 내 안의 소리로부터 도망쳐 껍데기와 허영만이 남은 ‘예술가 지망생’으로 계속 살 것인가? 그것이 문제이다.


2023.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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