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고.
알랭 드 보통.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 이름에는 내적 친밀감이 충만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헤밍웨이, 한강 - 죽기 전 언젠가는 읽어보아야지라고 되뇌며 다음 날의 나에게로 미루는 수많은 이름들처럼.
알랭 드 보통의 글은 가히 충격적이다. 사람은 하루에 6,000번의 생각을 한다는데 그 혼돈의 바닷속에서 유영하는 사유의 조각들을 어떻게 이런 간결하고 세련된 글쓰기로 담아낼 수 있을까?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립유치원 - 명문 기숙학교 -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이어지는 영국의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그가 고작 23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쓴 소설이라기엔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현학적이라 이 사람도 진도준처럼 인생 2 회차인 게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책의 줄거리는 정말 간단하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여자랑 연애한 썰. ssul 정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작품의 매력은 언뜻 평범해 보이는 재료들로 풍미 있는 요리를 만들어준다는 데에 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낭만적 운명론’인데 989.727분의 1의 확률로 비행기 옆좌석에 앉은 클로이에게 첫눈에 반한 주인공처럼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이 필연적인 사명처럼 느껴질 때 사랑에 빠지게 되고 마찬가지로 그 사람과 함께하는 일상에서 이러한 절대적 필연성의 부재를 느낄 때 그 끝을 직감한다는 이론이다.
그렇기에 연애 초기의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들, 결국 그 모든 질문 속에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나는 누구여야 합니까?"라는 본질적인 질문이 숨겨져 있다. 자신이 원하던 클럽에서 자신을 받아주자 오히려 그 클럽을 거부한 희극인 마르크스처럼 우리는 종종 한없이 완벽해 보였던 대상이 돌연 우리에게 사랑을 돌려줄 때 자문하게 된다 - "그/그녀가 정말로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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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4)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 그 사람의 눈, 코 입에 빠져들 것 같은 감정이 든다는 것, 나는 정말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 아니면 그 사람의 입, 눈, 얼굴 주위에 형성된 하나의 관념을 사랑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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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인식론적 관점과 의심의 눈으로 사랑을 바라보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이 "객관적 실재와 관련이 없는 내적인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비극"에 도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 동시에 두려움에 빠지고 사랑을 함과 동시에 미워한다. 행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갑작스러운 공포에 의해 생기는 안헤도니아 같은 병처럼 말이다.
사랑의 마지막은 대개 "너는 나한테는 너무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결국 이 말은 보통의 표현대로 "감정의 석조 장식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몸체로부터 느릿느릿 떨어져 나가며 한때 귀중하게 여겼던 대상에게 책임감만 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의 다른 말일뿐이다.
한줄평: 사랑이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을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끌어와 낱낱이 해부해 주는, 사랑의 아름다움과 찌질함을 동시에 맛보게 해주는 달콤 쌉싸름한 다크초콜릿 같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