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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나에게 쓰는 편지 (2)

으깨진 오렌지


안녕. 오랜만이네.


분명 다시 편지 쓸게라고 말했는데 해가 두 번이나 바뀔 동안 너에게 한 자도 적지 못했네.


있잖아. 나 꽤나 괜찮게 컸다? 키도 많이 크고 살도 많이 찌고 꽤나 번듯한 집에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와 살고 있어.


있잖아. 나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도 생겼다? 이건 꼭 너한테 자랑하고 싶었어. 친구라는 거 우리 인생에 있을까 싶었잖아 우리.


있잖아. 미안해. 네가 기대한 어른이 된 우리의 모습이 이러지는 않았을 텐데. 난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야. 여전히 거울을 보면 괴물이 보여.


있잖아.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 약도 먹어보고 운동도 해봤는데 맘처럼 되지 않더라. 난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야.


있잖아. 난 지금 그라나다에 있는 한 바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어. 조금 취한 것 같아. 모든 걸 내려놓으면, 여행을 떠나면, 술을 마시면 마냥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이것도 오답인가 봐. 난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야.


있잖아. 미안해. 난 정말 지겨운 인간이 되어버렸어. 나도 내가 지겨운데 다른 사람 눈에는 오죽하겠어. 지겹게도 우울한척하고 지겹게도 불행한척하고 지겹게도 불쌍한 척하는 인생을 살고 있어 난.


있잖아. 요즘 난 죽고 싶다는 생각을 부쩍 해. 근데 죽을 용기는 없어. 그게 너무 병신 같아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야. 어떻게 이렇게 진부할 수 있을까.


있잖아. 나는 너를 혐오해. 차라리 태어나지 말지 그랬어. 있잖아. 너도 나를 혐오하지? 우리는 병신이야. 쓰레기야.


있잖아.


나쁜 말해서 미안해.


또 쓸게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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