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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ine 육은주 Jul 31. 2022

K 팝이 장르가 되기까지


'엔터 3대장' 중 수장 격인 이수만은 1996년 HOT를 데뷔시키며, 일본의 아이돌 시스템을 한국에 도입했다. 그는 일본의 아이돌을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노하우와 시스템으로 업그레이드한 후 해외시장 개척에 눈을 돌렸다. 아이돌의 본고장 일본, 아직 연예산업이 일천하던 중국 시장을 직접 공략했다. 그는 일본시장에서 '보아'라는 상품을, 초기 중국 시장에서 'HOT'라는 초히트 상품을 냈다. 중국에서 HOT의 인기는 상상 이상이다. 뉴욕 연수 시절 필자는 중국어를 잠깐 배운 적이 있다. 강사는 30대 초반 후베이성 출신의 여성이었는데, 자신을 HOT 멤버 강타의 광팬이라고 밝혔다. 영어로 설명된 표준 중국어 교재에서 한국인은 멋있고, 세련된 멋진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었고, 심지어 중국 주인공 캐릭터의 애인이었다.

박진영은 미국 시장을 노렸다. 2010년 무렵 한창 전성기 때의 원더걸스를 맨땅에 헤딩하듯 미국 투어로 생고생시켜가며 의욕적으로 미국 시장을 두드렸으나 실패했다. 당시 미국 이스트빌리지 근처의 녹음실을 방문해 박진영과 원더걸스가 작업중인 모습을 본 기억이 새롭다. 

BTS의 아버지 방시혁은 박진영 JYP 엔터테인먼트의 파트너 작곡가 겸 프로듀서로 있다, 독립해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라는 독립 레이블을 만들었다. 

그는 박진영이 못 이룬 미국 시장 진출, 더불어 BTS로 Kpop의 글로벌화를 동시에 이룬 인물이다. 한국 엔터테인먼트의 3대 거물 박진영이 못한 일을 서울대 미학과 졸업, 강변가요제 출신의 조용해 보이는, 언론과의 접촉도 거의 없는 은둔형의 음악경영인 방시혁이 어떻게 이룰 수 있었을까. 


BTS 유니버스


대중음악에도 형식보다 내용(메시지) 이 더 중요하다. 박진영의 섹시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싸이의 키치와 풍자는 전세계적인 공전의 히트를 쳤지만 원히트 원더로 그쳤다. 

반면, 음악을 커뮤니케이션의 확장이라는 방식으로 접근한 방시혁은 그 내용과 형식에 모두 ‘혁신’을 활용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박진영이 어렸을 때 미국에 거주한 경험으로 미국 흑인 문화에 익숙했으며, 미국 팝적 세련미에 섹시한 이미지와 성(SEX)을 가미해 주 콘텐츠로 삼았다면, 방시혁의 BTS는 한국적인 정서, 오리지널리티를 바탕으로 청소년에 던지는 메시지, 청소년의 불안과 방황 등에 공감하는 내용으로 북미를 필두로 영국 등 유럽, 영어권, 남미, 중동 등으로 전세계 청소년들과 그 부모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현재 우리는 세계인, 또는 영어권의 친구들과 말을 하려면 영어를 사용한다. 발음은 원어민처럼 완벽하게 하는데, 말에 담아내는 내용이 감탄사 뿐이거나 별다른 내용이 없다면 큰 공감을 받지 못한다. 그저 흉내만 내는 것이다. 그러나 발음은 다소 어설퍼도 담고 있는 메시지가 이유 있고, 신선하고 공감이 간다면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긍정반응을 얻어낼 수 있다. 

BTS의 아버지 방시혁은 음악을 바로 그렇게 접근한 것이고, 그 커뮤니케이션 채널로 유투브라는 신생 매체를 활용했고, 팬들과의 공감대로 아미라는 강력한 팬덤현상을 만들어냈다. BTS와 아미들이 자주 언급하는 ‘선한 영향력’, 아미라는 공동체와 그들을 끈끈하게 엮어내는 공동체정신으로 그는, 이른바 요즘 젊은이들이 ‘마블 유니버스’’마블 세계관’등으로 즐겨 말할 때 사용하는 유니버스, 즉 ‘BTS 유니버스’를 창조한 것이다.

아다시피 BTS 멤버 중 영어로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한 멤버는 '영어 독학 천재' RM뿐이고, 그 흔한 강남 출신은 석진 한 명 뿐, 나머지 멤버들은 모두 지방 출신이다. 그런데 멤버들의 ‘찐 토종스러움, 촌스러움(스타일의 촌스러움이 아니라 정서상의 찐 한국인스러움을 말함) ‘이 오히려 세계에 먹히는 것이다. 감사하다고 관객들께 큰 절을 올리는 마음, 떡볶이와 곱창 등 하드코어 한국 음식을 띄우고, 한국말은 ‘안녕’밖에 모른다고 '영어 갑질'을 하는 인터뷰어에게 ‘hello’라고 딱한마디 해서 한방 먹이는 그들의 태도에서 쫄지않는 당당함을 본다. 음악에 국악을 녹여내는 실험 등에서 오리지널리티에 천착하는 노력을 본다. 

방시혁 HYPE 의장은 음반 제작자, 엔터테인먼트 기업 CEO이기보다는 커뮤니케이션 기획가, 혁신가이기도 한 것 같다. BTS가 세계적 그룹이 되고 난 후, 전광석화처럼 벌어진 빅히트에서 HYBE로의 퀀텀 점프, 미국 프로듀서 스쿠터 브라운과 그가 거느린, 저스틴 비버, 아리아나그란데 등을 품은 것을 보면, 그의 스케일에 놀라운 구석이 있다. 앞으로 그가 그려 나갈 세계문화지형에서의 도전과 판을 보는 색다른 시각과 또다른 혁신을 기대하는 이유이다. 


나비효과의 데자뷔


요즈음 작곡가이자 안테나 뮤직 CEO 유희열이 일본의 세계적인 작곡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작품들을 표절했다는 주장과 유희열의 소심한 반박, 그리고 그가 진행하던 장수 음악 프로그램에서 사퇴하는 사태로 시끄럽다. 온라인상에서는 ‘내 청춘을 위로한 음악이 표절이었다니, 청춘을 도둑맞았다’ 또는 ‘일본의 음악성이 우월하다’, ‘자괴감 느낀다’ 는 등의 자조와 자학도 꽤 보인다. 유희열을 비롯한 다수의 유명 작곡가의 표절이 의심된다고 하여 한국 대중음악의 과거도, 현재 성과도, 미래도 미리 자학하거나 예단할 수는 없다.

간단하다, 그냥, 인정하면 된다, 인정하되 우리만의 자긍심과 자신감, 오리지널리티를 잃지 않으면 된다. 한때! 문화산업적으로 일본의 사례를 많이 모방했고, 참조했고, 레퍼런스 삼았다가 사실이다. 문화 산업적인 시장의 크기, 음악 저변과 다양성 등에서는 아직도 일본이 앞서는지도 모른다. 반면 가치적, 밸류적으로는 우리 음악, 우리 문화의 앞선 강점이 있다. 

개인적으로 일본이 음악성이 우월하다는 데 동의할 수 없다. 산업적으로 앞선 부분이 있었다는 데는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음악성이라는 value는 우리 한국인이 앞서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 음악은 기본적으로 인상파 음악이라 본다. 거기에 미국 팝을 모방하여 Jpop을 문화산업화했다. 사카모토의 음악에서 보듯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방한다. 사카모토가 어린 시절 드뷔시의 현신이라 자부한데서 보듯, 일본은 인상파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본과 인상파와의 연관성은 미술에서 더 유명하다.) 그리고, 일본 전통음악은 밋밋하고 단조롭기 그지없다. 일본 음악이 예쁜 소리, 아름다운 소리 뿐이라면, 우리 음악에는 거기에 더해 현대적인 미를 가르는 기준, ‘아름다운 것만이 선한 것이다’라’ 기존 전통 미학과 현대적인 미학을 가르는 현대적인 ‘추(醜)의 미학’이 있다. 시끄럽고 탁한 소리까지 보듬어내는 우리만의 깊이와 넓이, 오리지널리티가 있다. 우리는 국악, 전통음악이 이미 현대적 추의 미학을 달성한 경지이다. 그리고 외국의 것을 품어 소화해내고 혁신해내는 능력이 있다. 

유희열 표절 사태를 보면서 데자뷔처럼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문화산업은 역사성만큼이나 우연성, 예기치않은 여러 효과들이 겹쳐지는 것이기도 하다. 한 두가지 원인이 아니고, 문화를 이루는 바탕과 그 참여자들, 수용자들에 관련한 변수가 너무 많아 문화현상에 대한 예측, 전망도 의미 없다. 

한국 가요의 중흥기, 르네상스라 회고되는 90년대 중후반, 공중파 방송의 생방송 음악방송프로그램 (당시 ‘인기가요 베스트 50’)을 처음 연출하게 된 한 신입 PD가 있었다. 그는 1996년 10월 내한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라이브와 음악 애호가 친구들의 격려에 '필 feel' 받고, 과도한 의욕과 불타는 사명감으로,  모든 가수들에게 출연하려면 반드시 라이브를 하라고 선언했다. 사실 미친 짓이었다. 라이브 생방송 시스템도 미비한 상태로, 한동안은 방송사고에 준하는 음악과 음향, 노래의 ‘삑사리들이 난무’했다. 

1997년 2월초부터 이후 상당한 기간 동안 모든 출연자들은 MBC에 출연하려면 반드시 라이브를 해야만 했다. 당시 대중음악계에 방송사의 영향력이 ‘신과 동급으로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선언이자 명령이었다. KBS ‘가요톱텐’도 가수들의 립싱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표명하고, 화면 상단에 ‘립싱크임’을 ‘돌돌 테이프’ 형태로 표기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가수 신해철 등이 한국방송사들의 시스템 미비, 생방송 집착의 제작상의 안일함 등을 비판하기도 했으나 그 마저도 TV 출연하려면 라이브를 해야 했다.  

부랴부랴 댄스그룹들도 가창력을 중시하기 시작, 가창력 담당 멤버 하나는 반드시 그룹에 넣고 다른 춤, 랩 담당 멤버들도 맹연습을 시키는 등 질적 변화를 꾀하게 되었다. 가요계에 라이브 실력과 춤, 용모 모두 갖춘 ‘아이돌 스타시대’가 준비되고, 도래할 수 있었다. K pop의 무시무시한 퍼포먼스 경쟁력이 이때를 기점으로 길러질 수 있었다. 

나비의 사소한 날갯짓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 그 PD는 당시는 미처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수많은 나비들의 날갯짓이 쌓이고 모이고 충돌하고 합쳐지면서, 예기치 않은 결과를 창출해내면서 오늘날의 한류가 만들어진 것이다. 유희열 사태 또한 표절에 대한 엄격한 자기 반성, 우리의 오리지널리티를 각성하는  나비의 날갯짓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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