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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비평문)
그들은 어떻게 지역성을 극복하고 영원의 예술가가 되었나
글. 육은주 (문화지정학 연구자)
이번 늦봄, 여름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전시는 경기도 용인의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환기 회고전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미국 작가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일 것이다. 두 전시 모두 구름 같은 관람객을 불러모으고, 줄지어 관람하는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최고 인기 전시이다.
김환기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유명한 작가인 동시에,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직후 한국 현대 미술의 근간을 확립하고, 뉴욕으로 진출, 한국 미술의 국제화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수많은 전시와 경매 등을 통해 한국 미술 최고가 기록을 경신해온 인물이기도 하다.
에드워드 호퍼는 평생을 뉴욕 맨해튼과 인근에서 살면서 현대인의 외로움 공허와 허무를 관통하는 시선으로 영원불멸의 상징적인 현대성(Iconic Modernity)을 획득한 작가이다.
얼핏 이 두사람의 작품에는 접점이 없어 보인다. 김환기의 점화(點畵)는 추상에 속하고, 에드워드 호퍼의 풍경(landscape) 은 리얼리즘 계열이라고 볼 수 있다.
두 사람은 활동한 시기가 겹치는 것도 아니고, 살아온 지역은 동경과 서울(김환기), 뉴욕 근교와 맨해튼, 케이프 코드(에드워드 호퍼)로 더더구나 겹치지 않는다. 물론 김환기가 1960년대 중후반, 뉴욕으로 이주, 점화의 화풍을 확립하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으나 그때는 이미 에드워드 호퍼의 사후였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우선 미술 변방의 작가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작가로 첫발을 뗀시기를 돌이켜보면, 두 나라 모두 변방이었다. 오늘날 단색화라는 장르를 만들어낸 한국 현대미술의 국제적 입지와 예술의 도시 파리를 누르고, 명실공히 현대 미술(Contemporary Art)의 본고장이 된 미국의 현재 입지로서는 상상할 수가 없던, 가장자리, 아웃사이더였다.
한국 미술은 일본을 통해서야 겨우 최선진 프랑스 파리와 유럽 미술의 흐름과 최신 동향을 파악할 수 있었고, 미국의 주류 문학가들, 작가들, 미술가들 또한 예술가 행세를 하려면 반드시, 프랑스 특히 파리 유학 또는 체류를 필수로 거쳐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에드워드 호퍼 또한 파리 시절이 있었다. 그는 파리에 세 차례 체류하며 비스트로 또는 와인가게(1909), 푸른 저녁(1914) 등의 작품들을, 그만의 파리 풍경과 인물들을 그려낸다. 그러나 1915년 무렵부터 미국에서는 더 이상 유럽의 부속이 아닌, 미국만의 독자적인 미술을 전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미국적인 풍경을 보고 싶어하는 강렬한 욕구가 대중들에게 나타난다. 호퍼 또한 이에 부응, 피리를 떠나 본격적으로 뉴욕에 정착하고 뉴욕의 풍경을 담기 위한 작품 시도를 거듭한다.
외국인으로서 우리는 뉴욕주와 뉴욕시티를 뭉뚱그려서, 명확히 구별하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쓰는데, 여기서 호퍼의 뉴욕이란 정확하게 보자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호퍼가 태어난 나이액 (Nyack)같은 뉴욕 주 교외와 다른 하나는 현대문명의 중심인 뉴욕 시티 맨해튼 지역이다. 나이액은 허드슨강 북쪽의 교외 지역으로, 기차를 타고 통근하는, 독특한 뉴욕 교외 직장인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호퍼의 그림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정서는 바로 이‘통근자 정서’이다.
호퍼의 그림에서 연이어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건물의 박공과 지붕 부분에 대한 천착, 야트막한 건물들의 옥상과 뒤배경으로 서있는 초고층빌딩 등의 시선의 위치는, 열차에 앉아서 바라보는 통근자의 시점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런 주변부의 통근자 시선(Commuter Viewpoint)은 1920년대 같은 재즈 시대(Jazz age, 대공황 직전의 미국문화 초유의 흥청망청 시대)를 살아간 스코트 피츠제럴드의 작품 ‘위대한 개츠비’에도 잘 나타난다. 소설 개츠비에 보면 여주인공 데이지와 그 남편이 롱 아일랜드시티의 공장지대, 무분별하게 들어서는 공장 굴뚝과 무분별하게 확장하는 (sprawl) 하는 삭막한 건물들 사이, 안과의사의 거대한 광고판을 뚫고 맨해튼으로 진입하는 부분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개츠비의 저택에서 연일 펼쳐지는 어마무시한 규모의 낭비적인 파티, 그 파티가 끝난 후, 마치 샤프의 대학가요제 걸작 노래‘연극이 끝난 후’ 같은 공허함과 잡을 수 없는 허무함 등이 이 당시 재즈 시대 예술가들의 작품에 일관되게 표현되어 나타난다.
김환기의 경우는 1913년, 일제 강점기, 전남 신안의 작은 섬에서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바로 일본 중학으로 유학, 시와 그림사이에서 고민하다 화가가 된다. 김환기는 각종 기고와 글을 통해 식민지 예술인으로서 느꼈을 변방성, 해방이 된 이후에는 예술의 중심지에서 멀디 멀게 자리잡은 조국의 예술적 입지, 그러나 혼란과 전쟁 속에서도 그치지 않은 예술혼, 국제무대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어떻게 자리잡을 것인가 하는 한국예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등을 강하게 보여준다.
그런 그에게 강한 영감을 주고 달 항아리 같은 한국적인 오브제, 한국적인 것,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천착에 영향을 준 인물이 바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로 유명한 최순우 전 국립박물관장이다.
김환기가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형식과 방법은 매우 시적이고 감성적이다. 김환기가 점차 추상화작업에 나아가는 과정에서조차도 그가 다루는 오브제들은 달, 항아리, 기러기, 하늘, 매화 등이다. 그리고 작품 속에 시를 적어넣는 그림을 시도하는 것에서는 조선 문인화의 정서가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 시절을 그린 작은 스케치 소품들을 보면, 피난민 천막촌과 부산 앞바다에 떠있는 피난배들이 생사를 다투는 전쟁 중이 아닌, 마치 차양을 치고, 즐거운 뱃놀이, 흥겨운 소풍이라도 떠난듯한 산뜻하고 가벼운 터치의 수채 풍경으로 그려진다. 피난지 천막촌에서, 190센티에 달하는 큰 키를 마음껏 펼수도 없는 낮은 양철지붕아래서 웅크려 밤낮없이 그림만 그린 그가 그린 그림들이라고는 믿기가 어려울 정도다.
이렇듯 태생의 주변성을 공통으로 하고 있을 망정 두 작가의 작품 스타일은 매우 대조적이다. 호퍼의 작품은 미국적인 물질주의(materialism), 인더스트리얼리즘에 충실하다. 화가가 되지 않았으면 엔지니어가 되었을 법한 호퍼는 당시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미국 맨해튼의 교통과 산업과 100층이 넘는 고층건물의 폭발 등 당시 세상 어디에도 없던 세계유일의 풍경들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우직하고 충실하게 그려낸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을 느끼는 것을 현대문명의 향유자인 우리들이 느끼는 현대인들의 정서이다. 유난히 과묵했다던 호퍼의 인생 여정이나 아내 조세핀의 기록, 꼼꼼한 장부등을 보면 그는 당시 미국 맨해튼의 각종 풍경들을 지극히 감성을 배재한 드라이한 시점으로 충실히 기록했음이 보인다.
그가 작품 속에서 의도적으로 인물들의 소외와 소통의 부재 등을 그리려 했다기 보다는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오히려 거대한 풍경의 소품으로 쓰이고 있는듯보인다.
미국에서 생활하다보면, 특히 교외 지역에 거주하다보면, 그 땅과 자연의 거대함, 이웃들과의 거리감 등으로 인하여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어쩔수 없는 무력감을 느낄 때가 많다. 필자 또한 짧은 미국 생활이지만,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많았고, 그런 감정의 원인을 미국이라는 나라의 거대성, 스케일에 압도당하는 무력감이라고 생각했다.
호퍼의 풍경에서 보이는 인물들은 그 ‘창백한 무력감’을 표현하는 도구라고 생각된다. 때문에 인물들의 피부는 유독 창백한 백인이며, 유색인종은 거의 보이지 않으며 작가의 인생 말기, 1960년대 혼란스러운 인권운동 상황 등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추구하는 창백한 무력감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호퍼의 통근자 정서, 산업화의 풍경(industrialistic landscape), 그 풍경 속에 질식된 도구와 같은 인간의 무력감 등이 시대를 넘어 현대적 보편성을 획득하고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 등을 상징하는 나른한 풍경이라는 영원성을 획득한 것이다.
김환기가 영원성을 획득하는 과정은 호퍼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먼저 김환기에게는 조국의 근대성도, 창백한 산업화의 풍경도 없었다. 대신 그가 천착한 것은 자신을 현대미술의 한가운데로 던지는, 자신의 주변성을 단번에 뛰어넘고자 하는 초인적인 노력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과 우주라는 근본, 심연에 대한 탐구였다. 주변부 예술인으로서의 태생적 한계성을 단번에 단축시킨 과감한 결단인 뉴욕 이주를 결단할 당시 그는 한국 현대화단의 대표주자로, 미술협회장으로, 홍대 미대 학장으로 이미 한국에서는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커리어를 쌓은 후였다.
김환기의 뉴욕 시대는 1964년부터 65년까지의 1기, 65-66년까지 2기, 그후로 각 2-3년 단위로 죽기 직전 1974년의 7기까지로 나누어진다. 2기에 ‘점화가 성공할 것 같다’라는 흥분에 찬 메모를 거쳐, 다양한 시험을 하는 3기를 거쳐, 4기로 분류되는 1969년부터 본격적인 점화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단색화가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지만, 단색화가 나올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단색화가들의 특징인 구도자적인 작업 특징, 반복해서 점을 찍는 지난한 작업은 단색화가들에게 모티프가 되었다.
김환기의 점화는 점 하나에 우주를 찍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도 같은 점이 없으며, 그 점 하나의 모양은 주변으로 번지며 수묵화적인 특성이 비친다.
처음 환기미술관에서 김환기의 대표작 ‘우주’를 보았을 때를 기억한다. 첫 눈에 그것은 경이로움, 놀라움이었다. 원래 제목이 없었고 기호로만 표시되던 그 작품 제목이 우주가 된 것이 이해가 되었다. 누구는 그 점에서 인생을 보고, 누구는 너와 나를 보고, 누구는 별을 보고, 누구는 깊은 바다를 보고, 누구는 우주를 본다. 그리고 그 점 하나의 특별한 개성과 그것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움직임과 율동과 멜로디에 감동을 받는다.
김환기의 시대를 초월한 영원성은 그가 목과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다 타계하기까지 매일매일 지난한 작업을 반복하는 구도자적인 특성과 인생의 깊이를 상징하는 듯한, ‘김환기 블루’라는 푸른 색에서 검은 색으로 변모하기까지 깊디깊은 색의 심연으로 이어진다.
1965년 브라질의 상파울루에서는 제9회 상파울루 비엔날레가 열렸다. 미국관에서는 에드워드 호퍼의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김환기는 대한미술협회 회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으로 비엔날레 커미셔너로 참가해 회회부문 명예상을 수상했다.
얼핏 이어지지 않을듯한 두 사람은 그렇게 브라질의 상파울루에서 조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