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 이후에도 우리는 어떻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가
어떤 관계는 큰 소리 없이 무너진다.
극적인 사건이나 명확한 장면 없이, 오랜 시간 쌓아온 신뢰가 어느 순간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나는 직장에서 정말 믿었던 동료의 장기간 거짓말로 큰 혼란을 경험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 사건 이후,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기준이나 시선이 달라졌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은 불안과 우울감을 안고 살아갔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트라우마일지, 아니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처일지는 잘 모르겠다.
그 구분조차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결국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무렵 읽게 된 책이 조지 보나노의 <결국 회복하는 삶>이다. 나는 고통에서 벗어나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방법을 몰랐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 견디는 고통은 매우 힘들다. 그럼에도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나노는 실증 연구를 통해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트라우마 이후에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고통은 분명 존재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일상의 기능을 유지한 채 살아간다. 그는 이를 정상적 회복(Normal Resilience)이라고 부른다. 회복은 극적인 각성이나 결단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고 하루를 살아내는 능력에 가깝다는 말이었다. 이 문장은 당시의 나에게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아직 괜찮아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실패한 상태도 아니라는 느낌.
그즈음, 지인의 추천으로 영화를 한 편 보게 됐다. 바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아내를 잃은 사람이다. 그는 깊은 상실을 겪었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지는 않는다. 일상을 유지하고, 아이와의 관계를 이어가며, 감정을 억지로 처리하지도, 완전히 밀어내지도 않는다
그는 ‘치유를 선언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영화는 말한다.
그 상태에서도 사람은 다시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고. 그건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삶이 다시 열리는 순간이라고.
책과 영화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보나노는 회복의 핵심을 유연성이라고 말한다. 고통을 없애려 하지 않고, 그 고통에 맞춰 삶의 형태를 조금 바꾸는 능력.
영화 속 주인공 역시 그렇다. 사별의 아픔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 사랑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아픔을 안은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관계로 나아간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회복은 ‘끝난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아픈 상태 그대로 진행된다.
이 책과 영화가 공통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회복의 끝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예전과 똑같아지는 것’도 아니다. 더 조심스러워질 수도 있고, 관계에 신중해질 수도 있고, 이전보다 쉽게 믿지 않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변화는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의 흔적이다. 보나노가 만난 사람들 역시, 영화 속 주인공 역시,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삶으로 나아간다.
돌이켜보면, 이 영화와 이 책은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영화 속 주인공은 아픔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 않는다. 기억은 남아 있고, 상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
보나노의 책 속 사람들 역시 그렇다. 그들은 고통이 제거된 상태에서 삶을 재출발하지 않는다. 대신 유연성을 발휘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아픔이 사라져야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아픔을 안고도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
이 점이 이 책과 영화가 공통으로 전하는 메시지다.
신뢰가 무너진 경험도, 사랑의 상실도, 그 순간에는 모든 것을 끝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아픔은 삶을 멈추게 하기보다는 삶의 방향을 조금 바꿔 놓는다.
다시 출근하고, 다시 사람을 만나고, 다시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고통은 서서히 무뎌진다.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지만, 삶을 멈추게 하지는 않는다. 영화의 주인공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듯, 보나노가 관찰한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듯,
우리 역시 그렇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다시 일상에 서 있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다.
아마 지금도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있다면, 그건 아직 끝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미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