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를 통해 용서(: 사랑)를 배웠다

하나님의 부르심 #2

by 유우미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다 보니, J는 또다시 내 안의 다른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셨다.


바로 지금껏 살아온 삶의 환경과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 나누길 원하셨다. 솔직히 이 영역만큼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음 싶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J와의 대화는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 달리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이어져갔다. 마음 한편에서 바랐던 일들 하지만 가능성 없어 보였던 그러한 일들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였다. 기적과도 같은 선물을 받을 자격 하나 없는 사람일뿐였는데 그저 J만의 사랑은 자신을 또 한 번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쌍둥이 중 첫째로 태어났던 저자는 엄마 아빠의 평범치 못한 사랑 속에서 자랐다. 어릴 적 느낀 사랑엔 따뜻함보단 꽤나 무섭고 외로웠던 느낌들로 가득했다. 엄마는 내게 사랑을 얘기했지만 그저 공감 못하는 엄한 양육자일뿐였다. 성장할수록 "너에게 이만큼 해줬으니 내게도 해줘야 해" 느낌의 사랑을 요구하는 듯했다.

아빠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였고 가장으로서의 권위가 무너진 그저 말없는 무관심의 사랑만 있을뿐였다.


성인이 돼서야 지금껏 자신이 받아온 사랑은 그리 건강했던 사랑은 아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뒤늦은 사춘기가 왔다. 착하게만 자라왔다 생각했던 다 큰 딸이 갑자기 반항이라도 하듯 목소릴 내기 시작했다. 부모는 적잖치 않게 당황했고 분노했고 울분을 토해냈다. 하루 건너 다툼은 연거푸 일어났고 집 안 분위기는 살벌 그 자체였다. 20대 중반에 가출까지 한 저자는 더 이상 부모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삐뚫어져 있었다. 부모 자식 간의 있어야 할 사랑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서로 외면하기 바쁜 마치 남보다 못한 사이의 모습들뿐였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 찌니 낙심할까 함이라(골로새서 3:21)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로새서 3:20)



가출을 하긴 했지만 겁은 또 많았던 저자는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의 집으로 향했다. 바로 친할머니셨다. 그때 당시 혼자 살고 계셨던지라 당분간은 할머니와 함께 지내야겠다는 생각에 가방 한 개 들로 무작정 집을 나왔다. 할머니는 그저 아무런 이야기 없이 자신을 받아주셨고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갔다. 할머니와 난 매일 저녁 함께 예배를 드렸다.(찬양을 부르고 성경말씀 읽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다였다. 근데 기도 시간이 될 때면 할머닌 내게 꼭 같은 말씀을 하셨다. "회개하자, 하나님께 회개하자."라고 말이다.


분명 (부모로부터) 피해자는 난데 왜 자신이 회개해야 할까, 억울하면서도 도통 할머니의 뜻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왜 그때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조금씩 깨닫게 하셨다. J는 부모를 통해서 내게 또 다른 사랑 용서의 마음을 가르쳐주시길 원하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태복음 6:12)



먼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해 보자.

한 마디로 저자는 J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았다. 죄인이었던 저자가 J의 십자가 사랑으로 인하여 완전히 새로운 (영적으로) 피조물이 된 것이었다. 실상 죄 사함을 받을 자격도 안 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죄로 인한 결과 즉 형벌을 받는 게 당연한 이치일 텐데 말이다.


그렇다. 사실 하나님은 죄에 있어 너그러운 분이 아니시다. 죄에 있어 그 누구보다 진노하셨지만 J의 십자가로 인해 사랑과 함께 조화를 이루셨다. 즉 진노와 사랑 모두 거룩하고 선함이 깃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셨던 것이다. 때론 죄를 고하는 회개의 시간을 가벼이 여길 때가 있다. 하지만 이 시간(회개)을 통하여 우리는 J의 사랑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J의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님께 용서받은 자는 더욱이 자신이 받은 용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도 J의 사랑을 닮아 자신 또한 용서의 삶, 사랑의 표현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말이다. 돌이켜보니 부끄럽게도 그러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용서받았다 하는 것은 자신이 타인을 사랑하고 베풀고 용서하는 역량이 자라고 있는지의 유무를 통해 알 수 있다. 저자는 이와 같이 행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회개했다.


용서받은 자로서 다른 그 누구라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자신은 할 수 없지만(그럴 만한 사랑이 없다) 거룩함이 담긴 사랑을 표현해 보겠다고 기도했다.



'용서'는 헬라어로 '카리조마이'라고 불리는데 여기서 '은혜'라 불리는 '카리스'의 어근에서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용서는 사랑을 계산적으로 대하지 않고 너그러이 베푸는 것, 용서는 자격이나 공로를 갖추어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J는 부모를 통해 용서의 마음을 배우게 하셨고 더 나아가 부모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으로까지 이끌어주셨다. 이는 결국 (자신에게는 없던) 사랑의 표현을 그것도 예수님의 사랑을 닮은 용서가 깃든 사랑을 할 수 있도록 새 문을 열어두고 계신 것였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부모는 딸에게 오히려 용서를 구했고 눈물을 흘리셨다.(그러실 분들이 아니라 생각했기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건강치 못하다 생각했던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 온전한 사랑이 되어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기 때문였다.


시간이 흘러 자녀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이 되어서도 J는 저자의 영적 부모가 되어 오직 십자가 사랑을 줄 수 있도록 지금까지 인도해가고 계신다.(오늘 역시 사랑을 주기 어려운 상황 속 J의 십자가 사랑만을 떠올리려 했다) 그렇게 J를 향한 신뢰와 사랑 안에 거하려 할 때마다 아무런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 점점 더 풍족해지고 있음을 또 한 번 느끼는 시간였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죄에 있어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분명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진노 속엔 거룩한 사랑 또한 함께 깃들어져 있기에 J의 십자가(사랑)를 받아들인다면 당신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J를 통하여 알게 된 십자가 사랑 속엔 결국 하나님과 저자의

관계만이 뚜렷하게 남아있게 됐듯 당신의 삶 속에도 그러한 관계만이 떠오르게 될 것을 감히 확신한다.


이제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용서받은 자로서, 이제는 너희가 서로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라고 또 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사랑 또한 정당하게 요구하신다는 사실을(이 모든 상황을 허락해 주신 분께 영광 올려드리기) 저자(그리고 이 글을 읽고 분들)는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읽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가 밝았네요. 여기저기에는 복 담은 인사를 돌렸었는데 브런치에선 조금 늦었습니다.

늘 부족한 글솜씨인데도 읽어봐 주시고 공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6년에는 더욱더 건강하시고 바라시는 모든 일 이뤄지는 복 된 한 해 보내시길 기도합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