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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미 Oct 28. 2023

내가 만난 작은 세상

그 속에서 어릴 적 나를 만나다

그때 당시  아이들이 마냥 예뻐 보였고 배운 만큼 이 아이들을 위해 이것저것 교육이란 것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교육은 무리, 보육차원의 수준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지 말입니다)


이전 회사 생활,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사실 아이들과의 교차점이 많았습니.(외국인 아이들이 한국에 방문했을 땐 이곳저곳 체험을 시켜줬고_통역, 한국 아이들에겐 외국어와 그 나라 문화들을 알려줬었기에_외국어교육) 그래서일까  어린이집에서의 아이들 역시 게 허락된 나름 세 번째? 그룹의 아이들이라 생각되었고 일의 연장선 같은 느낌였습니다.


1 외국인 아이들

2 학원서 만난 초/중/고 아이들

3 어린이집에서 만난 아이들(그때의 나)


그런데 생각지 못했던 상황이 이곳에서 벌어지기 시작했습니. 바로 어린아이들을 대하면 대할수록 지금의 나, 지금까지의 자신이 어떻게 자랐었는지를 성찰하기 시작한 것였습니다.

특히 원장님인 엄마가 어린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말입니다.


엄마의 교육관, 나름의 어린이집 원장님으로서의 원칙을 뭐라 말하고 싶은 건 아녔지만 그저 당신의 태도를 보고 있자니 어릴 적 자신이 아이들에게 투영돼서 보이는 듯했고 그 아이들은 나처럼? 자라지는 않았음 하는 맘에 불편함, 이상한 정의감마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 엄마와 사이가 그리 좋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를 하나로 꼽을 순 없겠지만 엄마의 양육방식을?  맘에 들어하지 않았습니. 한 마디로 엄마는 뭐든 엄마의 뜻대로 움직이길 바라는 사람였기에(매 순간 순종하는 딸로 키우시길 원했습니다) 집에서조차 엄마보단 원장님에 가까웠기 때문였습니다. 저는 늘 매뉴얼 안에 갇혀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만 했고 정답이라고 말하는 그 길 위에 서 있어야만 했습니. 엄마는 엄마의 모든 말들이 정답인 것처럼 얘기하셨지만 사실상 그저 어른의 뜻대로 따르길 바라는 말들뿐였다고 생각합니다.(물론 기본적인 당연함의 이야기들도 있었겠지만)


그래서  이 일을 하면 할수록 엄마와 함께 일하는 것이 힘들게만 느껴졌습니다. 어릴 적 는 한 번도 반항하지 않은 착한 딸이었는데 가 맡은 아이들에게 대하는 원장님 태도에 대해선 도저히 가만있기가 어려웠기 때문였습니다.(아이들의 자유의지가 너무 무시될 때, 원장님 말에만 순순히 따라야 할 때 즉 선생님의 교육관보단 원장님 원칙에 따라야만 할 때)


시작은 작은 불꽃같았지만 부딪히는 횟수가 늘었고 소리는 점점 더 커져 폭죽과도 같을 때가 많았습니다.(좋게 표현했지만 살얼음판, 전쟁터였습니다)

신입교사가 원장님 앞에서 자기 생각을 어필한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어디 감히!(다른 어린이집 가서 일해보니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그땐 신입교사, 정의감이 활활 불탔었고 엄마라는 이름 하에 는 생각 없이 거칠게도 말을 내뱉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 20년 가까이 자신이 만들어놓은 나름의 철칙과 교육관을 자식인 신입교사가 반감 들고 매번 날을 세우고 있었으니 엄마도 저도 서로 지칠 대로 지쳐있었습니다.


그리고 는 뒤늦게 어릴 적 나 그리고 지금의 자신까지 조금씩 이해하게 되면서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생각했던 사춘기란 게 찾아왔을 때쯤, 이 일을 하면 할수록 나름의 사명감, 소명이란 게 생겼고 이 소명을 계속 이어나가고픈 맘에 사직서를 준비했습니다.(자격증이 부여되고서 바로 엄마 직장서 일 했습니다)


제가 되고픈 보육교사는 더 이상 이곳에서 이뤄지기는 어렵겠구나 생각되었고 엄마란 사람, 20년 넘게 운영을 지켜오신 원장님의 방식을 더 이상 건드리고 싶지는 않아 내린 결정였습니다.(상대를 바꾸려 하기보다 나는 상대와 다르게 살면 된다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집을 나가기로 맘을 먹었습니.(할머니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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