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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Feb 25. 2022

우크라이나 위기

최근 푸틴의 우크라이나의 침공에 대해 전미국 대통령이었던 트럼프가 푸틴을 '천재적(genius)'이다, 매우 요령 있다( very savvy)라고 칭찬해서 구설수에 올랐다고 합니다. 이런 트럼프에 대해서 CNN은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자신의 영향력을 띄우기 위하여 미국의 대외정책을 훼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고 합니다. 가깝고도 먼 우크라이나 위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내부의 혼란이 외부의 간섭을 부른다.


1991년 우크라이나가 독립할 당시 우크라이나의 군사력은 유럽 최강 세계 4위였었습니다. 총병력 78만 명으로 1991년 당시 걸프전쟁에 투입된 다국적군보다 큰 규모의 군사력이었으며, 핵무기에 관해서는 세계 3위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1994년 미국 영국 러시아와 '부다페스트 각서'를 체결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1800여 개의 핵탄두와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을 모두 러시아에 넘기면서 비핵화를 하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이런 선택을 당시 우크라이나에 러시아제 핵무기는 다수 있었지만 핵무기를 운영할 능력은 없었고 체르노빌 사태로 핵의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핵무기의 관리비용과 폐기비용을 감안하여 현명한 선택을 하였다는 주장도 존재합니다.


그 이후 2009년에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다가오자 우크라이나는 2013년 10월 준비기간도 없이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의 전환하였습니다. 우크라이나의 군사훈련은 비용 때문에 중단되고 군인 봉급은 대폭 인하되었습니다. 부족한 국방예산을 마련하기 위하여 소련에서 물려받은 막대한 군사장비를 해외에 매각하였는데 그 주요한 사례를 살펴보면 2012년 중국의 첫 항공모함인 라오닝함은 원래 소련제 항공모함으로 1998년 중국이 마카오의 한 카지노 회사를 앞세워 해상 카지노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2000만 달러에 수입하여 마카오에 도입하였다가 2002년 랴오닝성의 다렌으로 옮겨서 10년 후 항공모함으로 재탄생한 것이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때 독도에 배치해 해상관광호텔로 사용하자는 의견도 나왔던 항공모함 민스크호는 다시 중국에 다시 팔려 홍콩 인근 공원에 전시 중이라고 합니다. 


이에 반하여 푸틴은 2008년 대규모 군사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당시 러시아군은 핵무기는 갖고 있으나 종이호랑이로 불려지고 있었고 고비용에 관료적이고 부패와 가혹 행위가 만연한 군대였습니다. 푸틴은 1890개의 군부대를 172개로 줄이고 징병제 복무기간을 2년에서 1년으로 줄이고 대신 부사관의 복지혜택을 늘리며 장기복무를 유도하였습니다. 육해공군 모두 막강한 미사일 전력을 보강하여 2015년에는 카스피해의 러시아 군함이 시리아의 IS 기지를 미사일로 공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흑해의 러시아 군함에서 우크라이나 지상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러시아군은 2012년에는 지상군에 대대전술단(BTG) 개념을 도입하였습니다. 대대전술단은 600~1000명의 병력을 기본 단위로 하여 독립 차량화 또는 전차 대대에 대전차 미사일·포병·수색·전투공병에 후방 지원 소대를 배속시켜 독자적인 작전을 가능하게 한 시스템입니다. 러시아는 170개의 대대전술단을 운용하고 있는데 우크라이나 사태에 동원된 병력은 17만으로 100개의 대대전술단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프리카의 갈등을 설명하면서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직선으로 그어진 국경선을 주요한 원인으로 설명합니다. 3000여 개의 부족들이 54개의 국가로 나뉘어서 과거 제국주의자들이 그어놓은 국경선을 따라 살아가야만 현실이 갈등과 분쟁의 역사적 원인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도 소비에트 연합에서 분리 독립하였지만 서부의 우크라이나인과 동부의 러시아인의 대립, 서부의 농업지대와 동부의 공업지대, 서부의 친유럽 성향과 동부의 친 러시아 성향의 갈등을 무시할 수 없게 됩니다. 2010년 대통령 선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결과는 친서방의 티모센코는 서부에서 91%의 몰표를, 친 러시아의 야누코비치는 동부에서 93%의 몰표를 획득하여 야누코비치가 당선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극명한 내부적 갈등은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외부세력들에게 좋은 먹잇감으로 보이는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동부와 서부의 극단적 대립 외부에서 쳐들어오기 전에 먼저 내부가 갈라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독립 이후 연이어서 친 러시아 동부 출신들이 대통령이 되다가 2004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선거부정 논란이 일어나면서 다이옥신에 독살당할뻔한 유센코가 재선거 끝에 51.99%의 아슬아슬한 차이로 당선되었습니다. 하지만 개혁노선의 차이로 유센코 대통령과 친서방 티모센코 총리가 갈등을 빚다 티모센코를 해임하고 오히려 대선 경쟁자였던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임명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2010년 선거에서는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이 되면서 1994년 부다페스트 각서 체결 당시 약속한 크림반도의 러시아 해군 철수도 당초 2017년에서 2042년으로 연기하여 훗날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의 빌미를 제공하였습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1995년 흑해 함대 분할 이후 러시아의 당면 과제인 부동항의 필요성 때문에 임대료를 내고 임차하여 사용하고 있었는데 서부 출신의 대통령이 당선되자 임대료를 4배나 올렸고 다시 동부 출신이 당선되자 기간을 연장해주는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원래 1954년 우크라이나 출신 당서기 후르시초프가 우크라이나에 행정구역상 편입시킨 크림반도를 러시아계가 대다수인 크림반도 주민들의 주민투표로 되찾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외신에서는 우크라이나의 할머니가 소총 사격연습을 하는 사진을 보여주며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항전 결의를 보여주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최고 재벌이자 8조의 재산을 가진 리나트 악메토프는 1월 30일 우크라이나를 탈출하였고 두 번째 부자이자 철강재벌인 빅토르 핀추크도 출국하였습니다. 현지 언론인 우크라인스카야 프라브다는 2월 14일 기준 해외로 탈출한 정치인 23명의 명단을 공개하였습니다. IMF 당시 서울에서 어느 구가 금 모으기 운동에 가장 비협조적이었는지 갑자기 기억났습니다.  


2. 국제사회에서 약속의 허망함


우크라이나가 국제사회와 유엔에 1994년 부다페스트 각서를 이행하라고 외치고 있지만 국제사회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에 푸틴은 서방이 독일 통일 당시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푸틴은 2017년 미국 영화감독과의 인터뷰에서 고르바초프가 소련 해체 당시 미국과 협상하면서 독일 통일 이후 더 이상의 나토 동진은 없을 것이라는 1990년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의 말만 믿고 그 발언을 문서화하지 않은 실수를 하였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정치에서는 모든 것을 문서화할 필요가 있는데, 문서화한 것도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서 구두 약속만 믿은 고르바초프의 실수를 비판한 것입니다. 당시 미국과 나토 사무총장은 나토가 동독의 동쪽 국경을 넘어 더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소련은 확신을 가져도 좋다며 "나토 관할지는 동쪽을 향해 1인치도 이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토는 1999년 헝가리, 폴란드, 체코 등 3국을 가입시켰고 2004년 발트 3국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등 옛 소련권 7개국을 가입시키며 확장시켜 나갔으며 2008년에는 옛 소련 소속국인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나토 가입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동진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역사적 경험을 살펴보면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러시아 침공 때 러시아는 넓은 영토와 강추위가 최대 방어 수단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광활한 러시아의 영토가 방어선 역할을 하였습니다. 옛 소련 시절 모스크바와 나토 사이에는 1800KM의 거리가 확보되었는데 우크라이나마저 나토에 가입하면 500KM로 거리로 좁혀지고 러시아는 나토 가입국과 국경을 접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역사적으로 키예프 루스 국이라는 동일한 출발점과 그리스 정교라는 종교적 동질성이 있는 나라로써 이들 국가들의 나토 가입은 참을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의 러시아에 대한 반감을 설명할 때 등장하게 되는 것이 1930년대의 홀로도모르라는 대기근입니다. 공식적으로 300만 명이 기아로 굶어 죽었다는 역사적 사실이고 많게는 1000만 명으로 추산되기도 합니다. 1930년대 스탈린이 집단농장 정책을 추진할 때 우크라이나 흑토지대의 자작농들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도 남겨두지 않은 것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이 주요한 원인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풍요로운 곡창지대를 기반으로 성장한 우크라이나 자영농들은 스탈린의 협동농장 정책에 비협조적이었습니다. 소련이 집단화 정책을 추진하며 부농들을 압박하자 부농들의 생산성은 추락하였고 가축들은 일시에 도축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농업지식이 부족하였던 공산당원은 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고 사료도 부족했으며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대참사로 이어지게 되었고 당시 수도였던 하리코프에는 길거리에 굶어 죽은 시신들이 널려있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대참상은 당시 소련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 '차일드 44'에 표현된 한 줄로 설명된다고 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처럼 줄어들어버렸고,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늙어버렸다."


3. 푸틴은 서방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는가?


미국과 서방은 러시아의 푸틴을 국제법을 어기는 무법자로 보고 있는데 그럼 러시아의 푸틴은 서방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98년 러시아의 모라토리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위기로 전 세계의 주가는 하락하고 있지만 반대로 석유가는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자원이 풍부한 러시아로서는 원하던 환경이 조성된 상황입니다. 하지만 1998년 러시아가 모라토리움을 선언할 당시 그 주요한 배경에는 국제 원유가 하락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2000억 달러의 대외부채를 지고 있었고 단기 국채만 600억 달러에 달하였습니다. 석유회사가 극도의 경영난으로 세금을 납부하지 못하지 정부가 석유회사의 파이프라인을 압류하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석유 가격이 떨어지면 러시아는 힘을 잃어버립니다. 2020년 4월에도 코로나 펜데믹으로 역사상 유래 없는 마이너스 유가를 기록하였습니다. 석유소비 정체로 공급과잉이 발생하여 석유 구입 시 오히려 보관비용까지 얹어주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의 위기 상황은 고유가를 초래하였고 산유국인 러시아로서는 유리한 상황이 전개된 것으로 보입니다.


러시아의 침공이 예상되자 주가가 하락하였고 바이든이 연설로 첫째 러시아 국책은행과의 거래 금지, 둘째, 러시아 지도층에 대한 제재, 셋째 러시아 국가 채무에 대한 제재, 넷째 독일과 노드스트림 2 중단을 발표하었으며 침공이 현실화하자 바이든은 추가 제제 안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나토와 미국은 러시아에 여러 가지 다양한 경제적 타격 방안을 고려하고 있지만 '부다페스트 각서'의 약속처럼 우크라이나에 직접 파병하는 것은 검토하고 있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푸틴은 2000년도부터 무능하다고 평가받는 옐친의 뒤를 이어 집권하였습니다. 옐친이 러시아 대통령이던 1996년 11월 미국의 JP 모건은 스위스 자본과 함께 러시아 채권시장에 처음 진출하였습니다. 차관을 제공하고 낮은 금리를 약속하였습니다. 28개의 러시아 기업들이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되었습니다. JP 모건과 골드만은 러시아 채권 발행의 주간사를 맡아 금리가 높다는 이유를 들며 채권을 판매했습니다. 채권 발행이 끝나자 골드만삭스와 JP 모건은 채권 가격을 후려쳤고 100달러의 채권은 50달러로 추락하였습니다. 월가 은행들은 챙길 만큼 챙기고 러시아를 떠났고 러시아는 달러 공황에 직면하였습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전향하여 러시아는 미국 월가에서 자본주의의 매운맛을 처절하게 실감하였습니다. 1998년 8월 러시아는 달러 유출을 견디지 못하고 90일간의 모라토리움과 루블화 절하를 발표하였습니다. 루블화 절하가 발표되자 신흥 재벌 베레조프스키는 옐친을 움직여 개혁성향의 은행가 출신 키리엔코 총리를 실각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당시 옐친의 정치자금 후원자이며 옐친의 딸과 비서실장과 친밀하고 TV와 방송국을 소유하고 굴지의 석유회사와 항공사를 소유한 재벌이 경제 개혁을 주장하던 총리를 실각시킨 것입니다. 베레조프스키는 옐친이 쇠퇴하자 떠오르는 푸틴으로 갈아타는 선택을 했지만 집권한 푸틴은 탈세와의 전쟁을 벌이며 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2000년 푸틴의 집권 이후 영국으로 망명한 베레조프스키는 망명한 지 13년 만에 런던에서 67세의 나이로 욕조에서 자살하였습니다.


러시아는 대한민국의 10위안에 드는 교역국이며 대한민국은 러시아에서 원유를 주로 수입하고 자동차가 수출품목 1위입니다. 과거 노태우 시절 제공한 경제협력자금 대신 러시아의 경제위기로 인하여 이전받은 불곰 무기도입사업으로 대한민국은 흑표전차를 개발하여 대한민국은 탱크 수출국이 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고, 이소연이라는 우주인이 먹튀를 한 경험도 있었지만 러시아 기술을 학습하면서 로켓을 쏘아 올리는 항공우주산업에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서 이소연도 생각나고 빅토로 안도 생각하나는 한 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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