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의 중심에 우뚝 선 조조는 이제 어디부터 정리해야 할지 선택과 집중에 들어갔습니다. 북방의 원소는 조조의 세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강대한 존재였고, 남쪽으로 형주의 유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먼저 유표가 형주의 울타리로 삼기 위하여 영입한 장수 정도의 체급이 아직 몸집을 불리지 못한 조조 입장에서는 적당한 스파링 상대로 보였습니다. 조조는 타깃을 남양의 장수로 정하였습니다.
유표는 반동탁 연합군의 손견이 형주자사 왕예를 참살하고 나자 동탁이 임명한 황족 출신의 인물이었습니다. 혈혈단신으로 형주자사로 임명되어 처음에는 지지기반인 군대가 없으므로 주변 눈치를 많이 보았습니다. 특히 원술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유표는 먼저 원술을 남양태수로 인정해 줄 것을 조정에 상주하고 반동탁 연합군도 지원하는 등 시대의 흐름에 따르려고 하였습니다. 먼저 유표는 형주의 유력한 호족들인 채모, 괴월, 괴량 들과 연대하면서 채모의 누이와 혼인하며 지지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유표는 형주의 토호들이 원술과 연합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 대책을 물으니 괴량과 괴월이 각기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괴량은 ‘인의지도’를 말하였고 괴월은 ”치세에는 ‘인의를, 난세에는 권모를 행하는 것“이라면서 이익을 보이며 각 우두머리를 불러 모은 다음 무도한 자를 처단하고 나머지를 달랜다면 반드시 사람들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표는 괴량의 말은 장기대책이고 괴월의 말은 단기대책이라며 괴월의 책략대로 형주의 세력가 55명을 초대한 다음 모두 몰살시켜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형주자사의 카리스마를 확보하였습니다.
조조가 헌제를 얻은 후 장안에 있던 이각은 죽임을 당하고 곽사도 부하에게 피살되었습니다. 동료였던 장제는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유표가 다스리는 형주로 쳐들어가서 양성을 공격하다가 화살을 맞고 죽었습니다. 장제가 죽자 조카인 장수가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침략군인 장제가 전사하자 형주에서는 승전 분위기였는데 유표는 노련하게
“장제가 곤궁하여 내가 다스리는 형주로 왔는데 주인으로서 빈객을 맞이하는 예를 다하지 못하였소. 장제가 죽은 것은 전혀 나의 본뜻이 아니오. 나는 단지 애도의 뜻만 받을 뿐 축하의 말은 받지 않겠소.”
유표의 이 말을 듣고 장제의 군사들은 기쁜 마음으로 유표에게 귀순하였습니다. 이제 식량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장수가 이끄는 장가군은 형주의 북방인 남양에 주둔할 수 있었습니다. 유표가 장수를 받아들인 것은 조조의 방패막이로 사용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장수가 완성에 주둔하고 있을 때 서량 군 최고의 모사인 가후가 장수에게 의탁하였습니다.
가후는 동탁과 같은 양주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는 한양 사람 염충만이 그의 재능을 인정하였던 이름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염충은 가후를 한고조 유방의 참모인 장량과 진평에 까지 비유할 정도였습니다. 젊은 시절 낙향하다 반란을 일으킨 저족에게 포로가 되었으나 자신을 강족 토벌의 명장 단경의 외손이라고 속이는 기지를 발휘하여 일행 중 유일하게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동탁의 사위 우보의 부하였으나 우보가 죽은 후 해산하려는 서량 군을 설득하여 낙양을 점령하여 이각 곽사의 시대를 열게 하였던 책사였습니다. 이각 곽사의 내분으로 고통받는 헌제를 위하여 꾀를 내어 이각의 부하들을 고향으로 떠나도록 하여 헌제를 도왔습니다. 이각의 곁은 떠나 같은 고향인 단외에게 의탁하였으나 단외가 의심이 많은 성격임을 알고 시기심에 의하여 해를 당하기 전에 떠나기로 마음을 먹고 마침 장수의 군대에 특별한 모사가 없음을 알고 장수에게 의탁하였습니다. 장수는 가후가 오자 특별대우를 하였고 단외도 가후의 예상처럼 남아있는 가후의 식솔들을 후대하였습니다. 가후는 완성에 도착하자 장수를 설득하여 유표와 화친하도록 하였고 장수를 대신하여 유표를 만났습니다. 유표는 가후를 극진하게 대접하였습니다.
가후가 돌아오자 장수는 가후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천하가 태평하다면 유표에게 의탁하여야겠지만 유표는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의심만 많고 결단력이 부족합니다. 유표를 따르다가는 나무 위에 목이 매달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장수는 가후의 조언에 따라 조조가 197년 정월 장수의 주둔지인 완현을 치기 위하여 육수에 주둔하자 장수는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항복하였습니다. 조조 입장에서는 손쉽게 남양 군을 접수한 것입니다. 하지만 조조는 장수의 심기를 거스리는 두 가지 일을 벌였습니다. 조조가 장제의 아내인 장수의 숙모 추 씨 부인과 동침한 것입니다. 장수는 이 소식을 듣고 “조조 이놈이 완전히 나를 능욕하는구나. 도대체 우리 집안을 뭘로 보고 이따위 짓을 하는 것이냐?”며 분개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조조는 장수의 휘하인 호거아가 용맹하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상금을 준 것입니다. 장수는 자신의 사람을 매수하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장수는 조조에게 투항한 지 겨우 10여 일 밖에 되지 않았을 때 가후의 책략에 따라 조조가 자신의 장막에서 추 씨 부인과 술을 마시고 있을 때 기습하였습니다. 조조는 간신히 살아 돌아왔지만 조조의 맏아들 조앙과 조카 조안민, 그리고 조조의 최고의 호위대장이었던 전위가 전사하였습니다. 조조는 완현 동쪽의 무음현으로 후퇴하였고 장수는 양현으로 물러났습니다.
198년 3월 조조는 2차로 장수를 치러 남양 군으로 향했습니다. 조조군은 양현에서 장수를 포위했으나 원소의 모사 전풍이 원소에게 이 기회를 이용하여 허도를 습격하라고 건의했다는 정보를 듣게 되었습니다. 조조는 급히 장수를 포위한 양현성에게 철수하였습니다. 장수는 추격군을 보냈고 유표도 지원군을 파견하였습니다. 장수가 조조를 추격하려 하자 가후는 반대하였으나 장수는 출병하여 대패하였고, 패전하고 돌아온 장수를 가후는 다시 격려하여 조조군을 대파하였습니다. 장수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다음 가후에게 가르침을 청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공의 말처럼 되었는데 도대체 어찌 될 일이오? 공이 나를 일깨워주시오.”
가후가 말했습니다.
“장군이 비록 용병에 능하지만 조조의 수준은 아닙니다. 조조가 퇴각할 때 조조는 반드시 후방에 장군의 추격을 대비할 것이니 장군께서 질 것을 알았습니다. 조조가 장군을 공격하다가 실패가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퇴각한 것은 반드시 후방에 변고가 생긴 때문입니다. 조조는 이미 이겼으므로 필히 경기병으로 신속히 진군했을 것입니다. 후방에 장수들이 있더라도 그들의 실력은 장군의 적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패한 병사로 싸우더라고 반드시 이길 것을 알았습니다.
조조는 장수를 굴복시키지 못하였지만 199년 11월 장수는 스스로 조조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장수는 원래 원소에게 투항할 생각이었으나 가후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첫째, 조조는 천자를 받들고 천하에 명령을 내리는 명분을 가지고 있다. 둘째, 원소의 군대는 강하기 때문에 장수가 적은 수의 군대를 이끌고 항복을 하여도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조조의 군대는 약하기 때문에 장수의 항복을 반길 것이다. 셋째, 조조는 패왕의 뜻을 지닌 인물이므로 사적인 원한에 구애받지 않을 것이다.
가후의 예상대로 조조는 장수의 손을 잡고 환영연을 열어주었습니다. 조조의 아들 조균과 장수의 딸을 결혼시키고, 장수를 양무장군에 임명하였습니다. 조조는 가후를 집금오에 임명하였고 가후는 조조의 아들 중 조비가 후계자로 옹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조비가 황제가 된 후 삼공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장수의 경우는 앙금이 남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조의 정실 정부인은 아이가 없었고 측실 유부인은 조앙, 조삭, 청하공주를 낳았습니다. 유부인이 일찍 죽자 정부인이 조앙을 친자처럼 길렀는데 조조가 장수의 숙모 추 씨와 정을 통하다 조앙이 전사하자 정부인은 조조에게 분개하였고 결국 조조는 정부인을 친정으로 보냈다가 화해를 청하였으나 용서받지 못하고 정부인의 친가에 개가 시키도록 권하였으나 모두 조조를 두려워하여 아무도 정부인과 결혼하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조가 죽기 직전 자신의 마음에 부담되는 유일한 일이 있다면 죽어서 조앙을 만나 어머니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없다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조비는 번번이 장수를 잔치에 초대한 뒤에 ”내 형을 죽인 그대가 어떻게 뻔뻔하게 아버지의 녹봉을 받아먹고살 수 있는가? “라고 들볶아서 결국 자살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는데 장수의 아들 장천은 훗날 219년 위풍의 난에 연좌되어 아들과 함께 참살되어 대가 단절된 것을 사실이라고 합니다. 실제 반란에 가담한 것인지 누명을 쓴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장수가 조조를 선택한 것이 가후에게만 좋은 선택이었을 가능성도 많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