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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Jul 14. 2023

<제14화> 원소가 두려워한 공손찬

하북의 패자가 되었던 원소가 가장 두려워한 상대는 막강한 기병부대를 거느린 유주의 공손찬이었습니다. 반동탁연합군이 해체되고 군웅할거가 시작될 무렵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두 영웅은 손견과 공손찬이었습니다. 손견은 원술의 부하가 되기를 자청하여 형주의 유표와 싸우다 전사했지만 공손찬은 유주의 지배자가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191년 공손찬은 2만의 군사로 황건적 잔당 30여 만과 싸워 이기면서 그 이름을 떨쳤습니다. 하지만 192년 원소와의 계교 전투에서 예상외로 패배하였고 193년 상관인 유주목 유우를 죽이면서 인망을 잃어버렸습니다. 마지막은 역성에서 199년 원소군에 의하여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공손찬은 2000석 가문의 아들이었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천하였으므로 공문서를 베껴 쓰는 낮은 말단 비서직인 문하서좌로 근무하였습니다. 하지만 잘생긴 외모에 뚜렷한 목소리와 넓고 포괄적인 내용을 단 한 차례의 보고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짧고 핵심적이며 논리적인 보고로 태수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후태수는 낮은 신분의 공손찬을 사위로 삼았고 노식의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는 특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탁군 출신의 저명한 유학자 노식의 문하에서 유비의 선배로 동문수학하면서 유비의 출세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유태수 밑에서 근무하다 유기가 지금의 베트남 지역인 일남으로 유배되자 수발을 들러 가면서 조상의 묘가 있는 북망산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 모습을 본 사람마다 비장한 태도에 한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무척 의리있는 남자였던 것으로 보이며 다행히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사면령이 내려졌고 효렴으로 천거되어 요동속국의 장사로 임명되었다고 합니다.      


공손찬은 변방을 순찰하다가 고작 수십 명의 기병으로 선비족 기병 100여 명과 싸워 수십 병을 살상하고 부하 절반을 잃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선비족들은 감히 후한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용맹스러운 점도 있지만 무모하다는 평가도 받게 되었습니다. 전 태산태수 장거와 장순이 오환족과 선비족과 연합하여 187년 10여 만 명을 이끌고 하북을 휩쓸자 공손찬은 용맹한 전투력을 발휘하여 연전연승하였습니다. 188년에는 석문산에서 장순과 구력거의 군대를 대파하였으나 포위되어 병사의 반 이상을 잃었습니다. 이 공로로 기도 위에 임명되었습니다.      


188년 유우가 상관인 유주목으로 부임하자 유우의 명령으로 1만의 병력을 이끌고 우북평군에 주둔하였습니다. 유우의 전략은 공손찬의 이민족에 대한 강경책과는 달리 회유와 설득에 의한 유화책을 도모한 것이었습니다. 이민족에 대한 토벌로 군공을 세울 기회를 노리던 공손찬은 유우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고 이 갈등은 마지막까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191년 공손찬은 2만의 병력으로 청주와 서주의 황건 잔당 30여만 명을 토벌하였고 공손찬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공손찬의 상관인 유우는 공손찬을 통제하려 하였지만 공손찬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자 유우는 군량과 보급품을 줄였고 양자 간의 감정의 골은 깊어져 갔습니다. 당시 유우의 아들 유화는 천자가 있는 장안에서 시중으로 있었고 헌제는 유화를 통하여 유우에게 군대를 이끌고 맞이하러 나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유화는 원술의 영지를 지나면서 원술에게 천자의 생각을 전하였고 원술은 유우를 이용하여 도움을 받고자 유화를 인질로 잡고 아버지 유우에게 군대를 보내라는 편지를 쓰라고 협박하였습니다. 공손찬은 반대했지만 유우는 편지를 받고 수천의 기병을 원술에게 보냈고 공손찬은 원술이 자신이 반대한 사실을 알게 될까 봐 사촌동생 공손월을 원술에게 보내 유화를 잡아놓으라고 말하였고 결국 그 사실을 유우가 알게 되었습니다.       

 

191년 원술 군과 원소군이 영천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원소 측의 주앙 군의 화살에 원술 군인 손견 측 공손월이 전사한 것입니다. 공손월은 공손찬의 사촌동생이었고 분노한 공손찬은 원소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공손찬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는 원소는 보복을 피하고자 자신이 동탁에게 받은 발해태수 인수를 또 다른 사촌동생인 공손범에게 넘겼으나 싸움을 피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시기 공손찬은 자신의 부하를 기주와 청주 지역에 자신의 임의대로 배치하였습니다.     


192년 계교전투가 벌어지자 모두 공손찬의 우세를 점쳤습니다. 공손찬은 보병 3만을 중앙에 배치하고 좌우에 기병 5,000명을 각각 배치하였습니다. 선봉에는 공손찬이 자랑하는 기병대인 백마의종을 배치하였습니다. 원소군은 선봉에 국의가 이끄는 방패부대 800을 배치하였고 그 뒤에 쇠뇌부대 1000명을 배치하였습니다. 공손찬은 국의의 선봉부대가 적은 것을 보고 먼저 기병으로 기선제압을 시도하였습니다. 공손찬이 기병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기세를 울리며 달려갔으나 양주 출신의 전투 경험이 풍부한 국의는 침착하게 보병 뒤의 쇠뇌부대로 기병들을 쓰러뜨린 다음 보병들이 기병 1000명을 참하였습니다. 공손찬 군은 후퇴했으나 국의의 부대는 이를 추격하여 건너편의 공손찬의 본영까지 점령하였습니다.      

한 번의 반전은 있었습니다. 승리한 원소군이 휴식을 취할 때 공손찬의 2000의 기병이 갑자기 원소 일행을 포위하였습니다. 원소 주변에는 100여 명의 군사뿐이었습니다. 비 오듯이 화살이 쏟아졌고 전풍이 얼이 빠진 원소를 부축하여 목숨을 구하였습니다. 목숨을 거둔 원소가 쇠뇌수들에게 화살을 쏘도록 명령하였고 국의의 군사들이 가세하면서 공손찬의 기병들은 달아나 버렸습니다. 공손찬의 병사들이 원소가 얼굴을 몰랐기에 원소는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배송지가 인용한 ‘영웅기’에 적힌 사실이라고 합니다.      

이후 원소와 공손찬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서로 간에 피로를 느끼고 휴전을 하였습니다. 193년 흑산적 우독이 수만 명의 반란 군을 이끌고 공손찬과 싸우는 원소의 후방인 업성을 점령하였고 원소도 공손찬과의 싸움에 전념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공손찬은 원소에게 패하여 발해까지 도주하였고 공손범과 함께 계현으로 돌아와 성을 만들었는데 유우가 있는 곳과 가까웠으므로 서로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유우는 공손찬이 항명할까 두려워하였는데 먼저 선제공격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유우는 패하였고 거용으로 도주하였으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공손찬은 유우가 황제가 되려고 했다고 무고하면서 참수하였습니다.      

 

유우의 옛 부하인 선우보는 공손찬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염유를 오환사마로 추대하여 군대를 지휘하도록 하였고 염유는 오환족과 선비족 변경의 한인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공손찬이 임명한 어양태수 추단과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이들은 유우의 아들 유화와 원소의 군대를 불러 모으고 오환과 선비족의  7000여 기병을 모아 도합 10만의 군사로 공격에 나서 195년 공손찬의 군대를 포구에서 격파하고 2만 명을 참하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태를 관망하던 주변 군현들은 일제히 공손찬이 임명한 관리들을 죽이고 유화의 군대에 연합하였습니다.      


공손찬은 전의를 상실하였습니다. 195년 근거지를 계현에서 역경으로 옮겼습니다. 그곳은 10장 높이의 토산을 쌓았고 곡식 300만 석을 저장하였습니다. 공손찬은 원소를 견제하기 위하여 흑산적 장연과 연합하였으나 장연과 연락하기 위하여 장연 진영에 있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원소군에게 발각되었습니다. 공손찬의 작전을 알게 된 원소는 편지에 약속한 대로 불을 피웠고 출진한 공손찬 군은 대파되었습니다. 역경에 은거한 공손찬을 원소군은 땅굴을 파 들어갔고 공손찬은 패배를 예감하였습니다. 원소보다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하던 공손찬은 허망하게 망하였습니다.    

  

공손찬은 유비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었습니다. 노식의 문하에서 후배였던 유비가 고당현의 현령으로 근무하면서 도적을 막지 못하고 도망친 과거가 있었는데 공손찬의 도움이 없었다면 삼국지에서 의미 있는 인물로 등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유비는 공손찬의 부하로 활동하면서 조자룡도 만날 수 있었고 평원상에 임명되면서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훗날 공손찬이 임명한 청주자사 전해와 함께 서주태수 도겸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자기 기반을 갖게 되는 군벌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유비가 관우 장비와 같은 협객들과 의형제를 맺었지만 항상 사족들의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설사 황제의 어명이라면 손해도 감수하였습니다. 반면에 공손찬은 점쟁이 유위대, 비단장수 이이자 상인 악하당과 결의형제를 맺었고 사족들을 탄압하였습니다. 당연히 유주 일대의 지식인들이 공손찬을 돕지 않았고 그 결과는 비참한 종말이었습니다.      


공손찬의 가장 큰 실책은 유우를 죽인 것입니다. 유우는 원소가 황제로 추대하려고 한 인물이었으나 흉노족에게로 도주하겠다고까지 말하며 이를 거부한 인물이었습니다. 공손찬은 유우를 황제가 되려 했다고 무고하면서 처형하였습니다. 유우는 유주 일대의 주민과 이민족들에게 인망을 쌓았던 인물로 그가 죽자 공손찬에 대한 반감이 커지게 되었고 공손찬은 유주를 군사적으로 점령만 하였지 민심은 이반 되고 말았습니다. 유우 처형이라는 악수가 부메랑으로 공손찬을 집어삼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전체적으로 공손찬에게는 다른 제후들이 찾고자 했던 모사나 책사와 같은 신하가 보이지 않았고 공손찬의 백마의종의 전투력만 부각되었습니다. 원소의 부하 국의가 그 허점을 발견하자 급격히 위세가 무너졌습니다. 문무의 적절한 조화가 아쉬운 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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